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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올에서 부르짖는 기도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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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올에서 부르짖는 기도 (욘 2:1-10)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요나는 선장을 향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의 몸은 거센 파도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 시간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선장 앞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는 요나 때문에 자연에 이변을 일으켜서 그를 색출하였고, 이번에는 바다의 물고기를 움직여서 요나를 통째로 삼키게 하였습니다. 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삼일 밤, 삼일 낮을 그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절에 그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음성을 들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1. 스올의 개념

성도가 세상에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하늘의 계시와 신비를 간직한 요나가 바다 속에 던져지고 급기야 물고기 뱃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거기서 ‘스올’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고통의 현장입니다. ‘스올’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1) 지옥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올, 음부, 무덤, 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와 같은 말들은 모두 지옥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이들은 모두 죽은 자가 가는 곳으로 어둡고 고통스러운 곳을 의미합니다. 지옥을 ‘게헨나(Gehenna)’라고 부르는데 이는 ‘불타는 곳’을 뜻합니다. 게헨나를 ‘힌놈의 골짜기’라고도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남쪽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골짜기로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곳입니다(대하 28:3). 성경에는 지옥을 불구덩이로 표현하였습니다(마 25:41). 마가복음 9:48-49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이 지옥의 고통입니다. 

2) 스올에서의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음부에 내려간 부자가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에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보면 음부에 있는 영혼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자의 소원은 거절당했고 오히려 고통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눅 16:25-26). 여기 요나도 물고기 뱃속 곧 스올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전자(前者)가 죽은 영혼이 가는 지옥이라면, 후자는 살아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현장입니다.

3) 스올의 현세적 의미를 생각합니다.

다윗의 시편처럼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시 23:4). 옛날 요셉을 잃은 야곱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창 42:38). 동방의 의인 욥은 잿더미에 앉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으면서 생일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가리켜 스올이 자기 집이고 흑암이 그의 침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욥 17:13). 요나는 3일 밤낮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스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멀리 달아난 사람이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심리적인 자괴감에 빠져버린 고통입니다. 그 숨 막히고 답답한 지경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다시 한 번 좌절하는 아픔일 것입니다.

2.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큰 고기의 뱃속을 ‘스올’이라고 표현한 요나는 자기가 왜 이토록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에게 역경을 통해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1) 자기의 과오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며 살아야 됩니다. 얍복강 여울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환도뼈가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브니엘의 감격을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창 32:30).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자기를 비추는 것을 최상의 축복으로 선언하였습니다(민 6:25). 그러나 요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또 선지자의 사명을 망각한 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주권자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발상이 더 큰 화근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게 되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요나는 일련의 고통 속에서 자기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쳤습니다.

2)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고(벧전 2:19),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마 5:10). 이런 경우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고난입니다. 욥의 고난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사탄에게 시험을 허용하였습니다(욥 1:8-12). 이와 같은 욥의 고난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성도의 인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됩니다(약 5:11). 예수님께서도 죄가 없이 고난을 당하여 우리의 표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평생 편안한 날을 보지 못했습니다.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갈 3:7).

3) 연단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롬 5:3-4).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인물은 하나같이 환난과 시험의 연단으로 인내를 길렀고 그릇을 키웠습니다.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욥 23:10). 요나처럼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재능이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만 합니다.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연단을 받고 새로운 가치관을 붙잡았습니다. 자기의 개성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방향전환을 하였습니다.

3.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은혜는 좋은 환경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올의 뱃속같은 극심한 환난 속에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와 함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동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고후 12:9).

1) 기도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요나처럼 자기의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도 물고기 뱃속에 갇힌 몸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던 그 기개나 패기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도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로 기도를 통하여 다가가는 은혜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2절).

2) 자기를 발견하는 은혜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는 요나의 기도는 너무나 처절하고도 집요하였습니다. 3절에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고 하였습니다. 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머리 위에는 깊은 물과 바다 풀이 감싸고 있고, 발 아래는 산의 뿌리까지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정확한 자기의 실체를 발견할 때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고, 자기의 무능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된다고 일러 줍니다(롬 7:24-25). 지금 요나는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3) 새롭게 도전하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8:1).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고후 5:17). 물고기 뱃속에서 극심한 스올의 체험을 하게 된 요나는 하나님만이 확실한 소망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은혜 받은 사람의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4절에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7절에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고 하였습니다. 9절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 새로운 세계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신 것입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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