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홍해 앞에 선 신앙 (출 14:6-7)

첨부 1


홍해 앞에 선 신앙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 갈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난처한 상황을 가리켜서 우리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한국의 유수한 회사 입사 시험에서 '진퇴양난'을 영어로 표현해 보라는 면접시험이 출제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면접을 보았던 지원자들 가운데 90% 이상은 장황한 여러 가지 단어를 떠올리면서 문장을 사용하여 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간단한 한 단어로 꼭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주 명답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간단합니다."라고 하더니 '진퇴양난'을 영어로는 '딜레마'라고 합니다.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딜레마'(dilemma)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다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 사이에서 직면하는 선택의 상황"

'뮤지컬 버스'라는 제목의 유명한 뮤지컬이 있습니다. 시끄러운 시골 동네 사람들을 태우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던 길에서 버스가 브레이크 고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한 쪽은 절벽이고, 한 쪽은 낭떠러지인 내리막길을 초조하게 숨을 죽이고 조심해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스 기사 앞에는 충돌 완충 역할을 해주는 건초더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기사는 거기 건초더미에 버스를 대면 인명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건초더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직진을 하게 되면 아이의 생명을 잃게 되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승객 전체의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와 같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을 떠나 숙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바로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고 있다는 다급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과 7절을 보면, 병거 육백 대, 그리고 애굽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바로가 추격을 해 오고 있습니다. 당시의 바로의 군대는 세계에서 최고로 잘 훈련된 일종의 정예부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병거 육백 대, 오늘날로 말하면 탱크 육백 대를 거느리고 추격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 바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홍해 바다를 '얌숲'(yam-suph)이라고 말합니다. 직역해서 말하자면 '갈대 바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바다는 산호초 같은 것들이 시간에 따라서 빛깔이 때로는 붉은 색조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홍해 바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어쨌든 앞에는 홍해 바다가 넘실대고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을 하고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하거든 

첫째로,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본문 1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이들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통하여 두려움을 먼저 언급했을까요?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생각과 판단력이 다 마비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나 혹은 어떤 상황이나 두렵게 하는 환경보다도 더 나쁜 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과거 1930년대에 미국이 경제 대공황을 겪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경제 대공황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취임 석상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두려워 할 오직 한 가지는 두려움 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라는 그 자체 하나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가 있겠습니까? 두려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은 우리들의 생존의 방식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면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두려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서 상당히 자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탄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마귀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도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든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대적하십시오. 그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 속에 빠져들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본문 10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의 후반부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두려움 속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이 그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의 포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아갈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방향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두려움이 당신을 사로잡으려 하거든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그 상황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순간, 기도를 하는 순간,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우리를 두렵게 하던 상황에서 떠나 이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순간에도 우리가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시선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전능자요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옮기는 기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진퇴양난의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셨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까? 충분히 기도하셨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이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에게 필요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르짖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면 그 다음에 필요한 기도는 '침묵의 기도' 혹은 '관조의 기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다른 말로 한다면 '바라봄의 기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면 이제는 침묵 가운데 잠잠히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 속에 극적인 개입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상황을 온전히 주께 맡겨 드림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일하실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주님께서 일하실 기회를 좀 내어 드리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너무 설쳐서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앞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사항 가운데 하나가 "들레지 말라",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온전한 침묵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침묵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침묵은 포기의 침묵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침묵입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때때로 저와 여러분에게 침묵과 맡김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 놓고도 여전히 우리의 힘만으로 발버둥을 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 설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싶어도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가 있습니다.

여름철이면 바닷가나 수영장에 가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구조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제일 구조하기 힘들어하는 대상들은 맡기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건져낼 때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종종 그런 경우에 그런 사람들을 끌고 나오면서 구조원들은 이렇게 소리를 친다고 합니다. "힘 좀 빼세요. 맡기세요. 숨 좀 쉬세요"

어쩌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맡긴다고 해놓고 여전히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치면서 허우적거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야, 힘 좀 빼라. 제발 좀 나에게 맡겨라." 이 시간 옆에 있는 분들을 바라보시면서 저를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힘 좀 빼세요" "이제는 주님께 좀 맡기세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왜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노력과 힘을 내려놓고 그분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을 다같이 잃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제 하나님이 싸울 테니까, 내가 일할 테니까 나를 좀 바라보라는 겁니다. 내가 싸우겠다. 내가 개입하겠다. 내가 구원을 베풀겠다. 그러니까 나를 바라보고 좀 기대하고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잠잠함을 요구하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 사막의 수도사들은 기도를 피상적인 낮은 기도와 깊은 기도의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피상적인 낮은 기도와 깊이 들어가는 기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설명하면서 거울과 창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피상적인 낮은 기도,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기도는 마치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거울을 보셨을 것입니다. 거울을 보면 무엇이 나타납니까? 제가 너무 심오한 질문을 했습니까? 거울을 보면 내가 나타납니다. 내 얼굴이 나타납니다. 자기 몰골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늘 자기의 몰골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자기 욕심, 자기 문제, 자기 고통, 자기 상처, 자기 소원, 그것 밖에는 기도 속에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좀 더 깊어지면 그 기도는 마치 창과 같습니다. 창에서는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창 건너편이 보입니다. 깊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창밖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거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이것이 깊은 기도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피상적인 낮은 기도에서 좀더 깊은 기도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통과해야 갈 과정이 있는 데 그것을 '잠심의 과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잠심은 잠잠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잠잠해 질 때 우리의 마음은 맑은 창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잠심'의 반대는 '분심'(分心)입니다. 분심은 마음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나누어집니까? 내 마음이 찢기워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 염려와 욕망과 근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마음, 분주한 마음에서는 결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 늘 자기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바쁘고 분주할수록 잠심을 배워야 합니다. 잠수하지 마시고, 잠심하십시오. 제발 주님을 좀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내어드리고 그분을 기대해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그만 발버둥치시고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잠잠한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진퇴양난의 상황들을 극복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부르짖는 간구와 잠잠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끝나는 그 다음 구절인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어찌해서 계속해서 부르짖고만 있느냐?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는 백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라. 전진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아직도 홍해 바다는 넘실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냥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바다가 갈라진 다음에 나아가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홍해 바다는 여전히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넘실거리는 홍해를 바라보며 그들은 담대한 첫 걸음을 내디뎌야 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는데 필요한 성경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거기에는 믿음으로 승리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증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에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믿음으로 건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홍해 바다가 쫙 갈라진 다음에 건너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건넜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아직 홍해 바다에 길이 나 있지 않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앞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니까 그 주님을 믿고 내 디디는 첫 번째 발걸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직 홍해 바다는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을 물 속에 잠그는 그 순간 홍해 바다는 쫙 갈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아직도 암담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업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충분히 기도하셨다면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성령의 감동하심이 내게 임하고 있다고 믿어진다면 이제 믿음으로 첫 걸음을 내 디뎌보십시오.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나아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첫 걸음을 내디뎌보십시오. 그러면 홍해는 갈라질 것입니다. 앞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길은 열려질 것입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소개했던 뮤지컬 버스의 이야기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는 건초더미로 직진하면 그 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나머지 승객 7명이 다 죽어야 합니다. 내리막길을 운전하던 기사는 마침내 승객 7명을 살리기 위해 건초더미 앞에 서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한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건초더미로 직진해 버립니다. 고장난 버스는 아이를 치고 넘어가 건초더미 속에 버스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승객들은 버스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걸어나옵니다.

그런데 살아 나온 그들이 그 다음에 발견한 사실은 자기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치고 넘어간 그 아이가 바로 그 버스 기사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고귀한 아들의 희생, 그리고 아들을 희생시킨 버스 기사의 그 사랑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아 버스를 떠나게 됩니다. 이 뮤지컬은 마지막에 이런 노래로 마지막의 막을 내립니다. "누군가가 사랑했기에, 그리고 누군가가 희생했기에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을 내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저는 제 인생의 홍해 바다에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제 인생을 붙들고 인도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애끓는 그 사랑으로 우리는 마침내 홍해를 열고 바다 속 새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아직 우리 가운데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주님 오신 이 계절에 우리 모두 오늘이라는 인생의 홍해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 깊고 놀라운 사랑을 만나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42편을 보면, 거기에는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은 다급한 상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영혼이 심히 낙심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심히 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엎드리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충분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잠잠히 서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성령이 마음속에 조용히 감동을 주시면서 여러분이 해야 할 작은 일 한 가지를 보여주시거든 믿음으로 그 한 걸음을 내디디십시오.

아직 해결은 요원하지만, 아직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믿음의 첫 걸음을 홍해 바다에 잠그는 그 순간 저는 믿습니다. 바다가 열릴 것입니다. 길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건널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현장에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