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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보혈] 강도에게 임한 십자가의 은총 (눅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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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당하셨던 십자가 고난의 계절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시던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하여 자원하여 발걸음을 옮기시던 예수님, 찾는 자들에게 “내로라” 하시면서 고난의 잔 마시기를 자원하시던 예수님 -- 우리 주님은 실로 놀라운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좌·우편에 각기 강도 둘이 달렸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이 때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요, 이 곳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장소이었습니다.   

  한 강도는 사형 집행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오만불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옆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불신과 조롱의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3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셨고 잠잠하셨습니다. 

  다른 한 강도는 그 친구를 꾸짖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옹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42절). 
  주님의 대답은 즉각적이면서 명쾌한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3절).

  본문의 두 강도의 모습은 기막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같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지만 한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만났고 또 한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지만 또 한사람은 끝까지 교만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은총을 받았지만 또 한사람은 영원한 저주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의 놀라운 음성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무한한 은총이 넘쳐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회개한 강도에게 임한 십자가의 은총,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용서의 사랑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생각해달라는 간청을 드리는 강도의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간청을 받은 즉시 구원을 약속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여기 회개한 자에 대한 용서의 사랑이 빛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은 용서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은총은 어떤 극악한 죄라도 용서해 주는 사랑으로 주어집니다.

  이 강도는 어떻게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아마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욕하던 이 사람이 예수께서 고통가운데서도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강도는 주님의 의연한 모습과 원수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야말로 장차 올 메시야 왕국의 왕이 되심을 깨닫게 되었고, 그분 앞에 겸손히 구원의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생동안 악을 행했던 행악자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죄악 가운데 보내버린 이 사람은 최후의 짧은 순간에 구원자를 만났고, 용서받았고,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실로 갈보리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요,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엄청난 고통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 십자가 위에서도 영혼 구원의 요청에 응답하시어 사랑을 베푸시는 신적 사랑의 소유자이십니다. 할렐루야! 

  초기 교회는 두 강도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빙성은 부족하지만 니고데모 외경이나 빌라도 행전, 아라비아 복음서 등에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비방한 사람의 이름은 기스마스, 저를 꾸짖는 사람의 이름은 디스마스입니다. 
  헬라 및 라틴 교부들은 디스마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 ‘착한 도적’(보누스 아스트로), ‘복음을 믿은 도적’(에반겔리쿠스 라트로) 등으로 불렀고, 이 강도는 나중에 로마 카톨릭에 의해 ‘거룩한 도적’(세인트 라트로) 이라는 칭호로 성인의 반열에까지 올랐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외경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지만,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여 구원받은 이 강도에게 임한 주님의 용서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십자가의 전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쏟아졌다고 했는데, 그 찌른 군인이 외눈 군인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가 그 군인을 덮쳤습니다. ‘내가 예수를 찔렀는데, 이 물과 피가 나를 저주했으면 했지 복이 될 리가 없으니까 나의 한쪽 눈마저 멀게 되겠구나’ 하고 군인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눈을 떠 보니까 감겨 있던 한쪽 눈마저 떠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그는 창을 내던지며 소리 질렀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를 찔렀는데, 예수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가 나를 축복하셨구나. 나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예수를 믿겠노라.”   

  성도 여러분, 이런 전설이 말하고 있는 뜻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 이제는 우리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넉넉한 용서의 사랑을 베푸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대속의 사랑

  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45절=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회개한 한편 강도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는 단순히 인간적인 큰 사랑이나 엄청난 용서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짐을 담당한 죽음이고,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고 둘 사이를 화해케 하는 화목제물의 죽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갈라짐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는 만민을 위한 대속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용서의 사랑을 뛰어 넘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랑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리스도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미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예언한 말씀을 보십시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십자가의 거룩한 도리는 만민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고, 회개한 강도가 받았던 은혜 또한 대속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자유주의 학자인 슐라이에르 마허나 부쉬넬 등이 주장하는 ‘도덕 감화설’ 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큰 고통을 받았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마음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는 그런 감화력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안중근 의사나 삼일 운동의 유관순 열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흔연히 생명을 버린 애국적인 죽음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뜨거운 애국심이 일어나는 것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고귀한 희생이 모든 분에게 감화를 주어 하나님을 잘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설명은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신화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명백히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인간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유능한 존재입니다. 도덕적으로도 제법 괜찮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구원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이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설’을 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은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개혁주의 선봉인 칼빈이 목숨처럼 지켜온 교리입니다. 
  내가 나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 앞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의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속을 의지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것 외에는 전혀 살 길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은총이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회개한 강도는 이 놀라운 은총을 받았습니다. 강도에게 임한 십자가의 은총은 거룩한 대속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속의 사랑을 맛보았습니까?  십자가 없이는 전혀 살 길이 없음을 확실히 믿습니까?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하십니까? 


3. 천국 약속의 사랑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강도는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약속, 곧 천국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 임한 십자가의 은총은 천국 약속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용서와 속죄를 넘어 천국을 확실히 보장하는 수준으로 나타납니다.
  선물 중의 최고의 선물은 천국의 선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소망은 내가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길래 그렇습니까?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천국의 모습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에 보여주는 한도 내에서 천국의 모습을 짐작할 뿐입니다. 

  계시록 4장에는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의 모습이 어떠하며, 그곳에서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드리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2장에서도 천국의 모습이 일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의 실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곳에서 주의 백성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천국을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은총은 천국을 약속해 주는 사랑입니다.

  천국은 성도에게는 고향과 같습니다.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서 말년의 평안을 누린 야곱도 고향 땅에 묻히길 원했고, 대국의 총리대신이었던 요셉 역시 고향의 품에 육신을 눕히기 원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의 역사가 구속과 해방의 역사이면서 고향 길로의 대역사였고, 이후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향이자 믿음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 그리고 지난 세기 시오니즘의 결과로 탄생한 이스라엘 국가는 이 삶과 믿음의 터전으로서 고향에 대한 엄청난 집념이 이룩한 결과인 것입니다.    
  동서고금 누구에게나 고향의 중요함이 있다면, 신앙인에게는 고향보다 더 강하게 우리 삶을 사로잡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생활에 묻혀 잊고 살 때가 많지만 크리스천은 본향에 대한 기다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본향으로의 구심력은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사망의 쏘는 힘을 능가하는 강력한 것에 이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이 돌아간 곳, 엘리야 선지와 스데반이 들림받아 올라갔던 곳,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본향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은 본향을 향해 길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고향 가는 천리 길의 어려움이 아니라 평생 동안 땀 흘리면서도 즐거이 달려갈 본향 길에 서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미국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정열을 다 쏟아서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 때문에 그의 아내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외톨이가 된 선교사는 선교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배가 미국의 항구에 도달했습니다. 갑자기 부두에서 예포소리와 함께 군악대의 나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갑판 위로 올라온 그는 그 배에 아프리카로 휴가차 사냥을 갔다 오는 미국의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두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습니다. 그 위로 대통령이 걸어가고 수많은 환영인파들이 대통령 내외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일부러 제일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습니다. 이미 환영인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그는 깊은 고독감 때문에 흐느끼면서 쓸쓸히 부두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나 열렬히 환영해 주는데, 선교지에서 가족을 잃기까지 한 나는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는구나!”  
  눈물이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석양빛이 환하게 그 선교사의 얼굴을 비추면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나팔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너를 위해 황금빛 유리가 깔린 길이 예비 되고 내가 너를 친히 마중 나갈 것이다. 너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이곳에 너를 위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날까지 인내하라. 이곳에서 너를 위한 성대한 환영식이 베풀어질 때까지...”

  선교사는 그 음성을 듣고 다시금 발길을 돌려 선교지인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선교사역에 더욱더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보고(寶庫)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의 뜻을 깨닫고 십자가를 보다 확고히 믿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 속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맛보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도 뜨겁게 경험하는 계기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
  주님의 대속의 사랑,
  그리고 천국을 보장해 주시는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감동하는 이번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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