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요 4:13-14)

첨부 1


영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고자 하셨고,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셔야 됐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남북으로 세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일 위의 지역이 갈릴리였고 중간이 사마리아였고, 아래지방이 유대지방이었고 예루살렘이 바로 이 유다지방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로 통행을 하거나 혹은 갈릴리에서 유다로 내려오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지 않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우회하여 이 양쪽 지방을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주전 722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곳은 한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운 아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이제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여러 식민지를 통치해 본 경험이 있는 아시리아는 이제 이 사마리아를 국제화 정책을 사용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사마리아 거민들을 외부로 이주시키고, 또 외국에 있는 사람들을 사마리아에서 살게 함으로써 결국은 피를 섞어 민족의 정체성을 흐리고자 하는 시도였는데 이러한 시도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북왕국 땅이었던 사마리아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제 언약 백성들의 그 둥치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북왕국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계속돼 왔던 영적인 피폐화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그 이후로부터 이 땅은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사는 대표적인 땅이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에 내려가 예배할 수도 없고 차단되어 그리심 산이라고 하는 곳,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그 산 중에서 특별히 축복을 선포한 그리심 산을 예배의 처소로 삼고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자신들 나름대로 해석이 덧붙여진 율법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 길러 온 이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한 그릇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물론 목이 말라서 이 여자에게 한 그릇의 물을 청하셨겠지만 이 여자의 곤고한 영혼을 보시고는 당신의 육체의 목마름을 잊고 이 여자의 메마른 영혼의 상태를 해갈해 주시기 위해서 집중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당시에 이 여자가 대낮에 물을 길러온 이유는 동네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석을 합니다. 대낮에 이 팔레스타인은 굉장히 덥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에 물을 길러서 생활을 했고, 이곳은 온 동네의 소문이 퍼져 나가고 정보들이 교환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자는 화자의 대상에 오를만한 여자였기 때문에 한 낮에 물을 기르러 온 것입니다. 


III.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A. 샘물을 구하는 여인 

예수님께서 물을 한잔 달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이 여자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왜 유대사람인 당신이 나같이 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구합니까? 당신들 유대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니지도 않고 또 나 같은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도 없는데 당신은 왜 나를 상종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 샘물, 혹은 생수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께로부터 채워지는 영혼의 만족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 42편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된 시인이 예배의 처소를 그리워하면서 성소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사슴들이 많습니다. 가을이 이 사슴들의 교미기입니다. 교미기가 되면 수컷들은 짝을 짓기 위해서 암 사슴을 찾아 나섭니다. 발정기가 될 때에 사슴의 몸에 심각한 변화가 오는데 그것은 타는 듯한 목마름입니다. 짝짓기를 위해 나섰다가 목마름이 엄습하자 관심사가 이제는 물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의 광야에 아무데나 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물인줄 알고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려가 보면 우물은 없어지고 메마른 땅만 펼쳐집니다. 반복되는 착각과 신기루 속에서 결국은 사슴이 거품을 물고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죽어갑니다. 

이러한 간절한 목마른 사슴에게 한 모금의 물은 물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절된 체 완전히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한번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죽어가는 이 시인의 영혼을 위한 그것을 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샘물을 구했고, 또 매일 이렇게 남의 낯을 피하여 물 길러 오는 수고와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그는 샘물을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이 여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의는 우리 인생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바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만약에 그런 물이 있다면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물을 길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슴을 졸이며 매일 이 우물가에 나타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있었기에 이 여자는 거듭거듭 주님께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B.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때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요구를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이 여자가 빗겨가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절반은 사실이었고, 절반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깜짝 놀랄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예전에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살아온 모든 과거와 현재까지 예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셨고, 또 미래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곤고한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고쳐 주시려고 오랫동안 이 여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였으면서도 늘 피하며 살아왔던 그 앞에 깨달으라는 듯이 이 여자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순간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을까요? 

이 여자는 다서 명의 남자를 갈아치웠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의 과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의 살아온 과거가 당신의 마음에 기쁘신 것은 아니었지만 실패하며 살아온 삶보다는 앞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그 날들이 더욱 예수님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여자를 향한 사랑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제일 좋은 친구는 소망입니다. 아무리 불행하고 고통스러워도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절망이 없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시는 주님은 변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시는 언제나 살아계시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소망을 갖는 것이에요. 


IV.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이 여자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너의 핏기 잃은 삶, 생명의 기운이 하나도 없는 죽어버린 자와 똑같은 삶, 그 원인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남편을 다섯 갈아친 너의 과거도 아니고, 그리고 네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 때문도 아니다. 그런 영생하도록 솟아나오는 샘물과 같은 은혜를 가로막는 것은 오직 죄 때문이라는 것’ 을 이 여자에게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세우고 싶어 했던 자리였습니다. 핑계 댈 것이 있는 한 인간은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할 말을 잊고 그리고 모든 핑계거리를 제거해 버려 이 여자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기쁨으로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영생하도록 솟아난 샘물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터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영생하는 샘물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도록 처음 하나님이 말씀의 지팡이로 샘을 터트리시는 사건이 첫 번째 중생과 회심의 사건이에요. 이후에 우리의 모든 삶은 이 샘을 가로막으려는 죄와 사단의 공격과 이것을 보호하여 계속 솟아나게 하려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싸움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부끄러운 과거에 직면하게 하시고 싶었던 것은 이 여자를 창피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편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고 또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중적인 목적을 실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단지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실낱같은 영적 목숨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은 주님의 구원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마음속에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 이상의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평탄하면 평탄하기 때문에 역경이 오면 역경 때문에 이기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바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낮아진 마음이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생명에 마음이 불타는 적이 있습니까? 형식과 위선과 거짓에 갇혀서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삶 속에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극히 불쌍히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운 이 불쌍한 여자를 부르시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문제가 아니라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샘솟듯 솟아나는 영적인 생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없고, 신앙이 없었더라면 이길 수 없는 길을 이기면서,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면서 그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되고,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우리의 기도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 정직하게 반성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도 한번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V. 결 론: 낮아짐과 갈망 

매달려야 합니다. 이 여자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셔서 다시 영생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없기 때문에 진실해질 시간이 없이 우리는 이 외적인 사물들에 의해서 휘둘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한 주간만이라도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굳이 안하던 일을 하란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면 너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합니다’, 곤고하면 곤고하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주님이 필요하면 원한다고, 죄가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파문이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진실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식과 허위, 이중적인 마음을 벗어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