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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 (빌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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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 (빌 1:8-22)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자란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무언가 못마땅한 일이 있었던지 그는 주인을 배신하고 많은 물질적인  손실을 끼치고 그는 주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물건과 같은 것입니다. 주인을 배신해서도 안되고 손해를 끼쳐서도 안됩니다. 노예는 일시키다가 병들면 가져다 내다 버릴수도 있고 말을 안들으면 때릴수도 있는 짐승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멀리 로마로 도망을 쳤는데 로마에서 우연찮은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위대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젊은 노예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고 그와 대화를 나눕니다. 복음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사도바울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젊은이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집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됩니다. 그는 고백하고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그는 이제 감옥을 떠날 수 있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사도바울에게 수종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젊은이를 늘 옆에 두고 싶지만 그럴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의 주인에게 편지를 써서 이 젊은이를 돌려보냅니다. 이 젊은이의 주인은 빌레몬이라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제목이 빌레몬서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다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도록 자기집을 제공할정도로 그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고 또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부유한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바울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 모든 과정들을 쭉 설명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이 오네시모를 낳았노라 믿음의 아들로 낳은겁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이 오네시모를 전과같이 종처럼 대하지 말고 그를 형제처럼 대우하라. 그리고 그를 벌주거나 책망하지 말고 같은 한 복음의 동지로서 그를 맞아들이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빌레몬이 사도바울의 편지대로 그대로 행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승을 비춰보면 빌레몬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집을 나갔던 오네시모를 그대로 용서하고 그를 형제처럼 받아들입니다. 마치 사도바울선생님이 온것처럼 영접합니다. 그리고 잠시머물다가 오네시모를 다시 사도바울에게 보내드립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순교하기까지 오네시모는 사도바울을 도우며 수종드는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그나티우스라는 아주 신실한 크리스챤이 예수를 믿다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순교당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는 도중에 각 교회 감독들에게 보낸 편지가 후대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보내는데 에베소교회의 감독인 오네시모에게 보내는 겁니다. 이 종인 오네시모가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우리는 역사속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되었던 노예되었던 오네시모가 사도바울의 사랑과 복음의 열정가운데에서 어떤 인물이 되었는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에 있을때 그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또 다른 영혼이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함이란 이것 같습니다. 그는 빌립보감옥게 갇혔을때도 거기서 간수장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서 간수장의 가족을 구원하게 됩니다. 

로마에서는 오네시모라는 이 노예를 예수의 사람으로 구원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향한 사도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도망간 노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눈에는 사랑의 눈으로 보는 오네시모는 위대한 감독이 될 가능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봐도 사랑의 안경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너무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속옷가게에 아이 하나가 어머니 생일이라고 옷을 사러 왔습니다. 점원이 묻습니다. 어머니 사이즈가 어떠니? 잘 모릅니다. 그럼 어머니가 뚱뚱하냐 날씬하냐 중간이냐 하니 아이가 그럽니다. 우리어머니는 굉장히 날씬하다는 것입니다. 점원이 이상하기는 한데 아이가 말하는대로 어머니가 중년이니 어느 정도 되겠다 생각해서 날씬한 중에서 조금 치수가 있는 것으로 포장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틀후에 어머니가 바꾸러 오셨습니다. 보니까 어머니는 상당히 뚱뚱한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상당히 날씬해 보였던 것입니다. 똑같은 것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모두가 등을 돌리고 모두가 손가락질 할 만한 이 한 노예를 사랑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위대한 감독이 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통해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져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사랑과 빌레몬의 넓은 아량과 용서 그리고 오네시모의 변화를 통해서 초대교회는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오늘 진정 이 시대에도 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영신교회가 사랑으로 세워지는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첫째는 사랑의 간구가 필요합니다. 8절 9절 10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랑으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간구가 필요하다. 오늘 8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빌레몬을 향해 내가 너에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고 나는 사랑으로 너에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은 어찌보면 사도바울의 제자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스승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당연히 명령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지만 그는 나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연로했습니다. 연장자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빌레몬은 중년 젊은 나이입니다.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령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한다. 간구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간곡히 요청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곡히 요청하고 그에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는 간곡히 부탁하고 있을까요? 오늘 오네시모라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도망간 오네시모,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간 종이라는 것은 아무리 내가 크리스챤이지만 못마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오네시모를 위해서 주인인 빌레몬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한영혼을 위한 간구인 것입니다. 한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한 영혼의 미래를 위해서 그는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전도한 영혼들을 위해서 그 영혼들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세워지도록 우리는 간곡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들을 설득해 왔습니까. 때로는 내가 전도한 영혼이 교회를 잘 나오면 좋겠지만 때로 그가 시험에 들어서 교회에 나오기를 거부할 때 때론 이런저런 모습으로 그가 주저앉을 때 우리는 얼마나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향해 설득하며 권면하며 간구해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가치로 보면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민도 아니고 노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돌에 맞아 죽을 몹쓸 노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주인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 때문에 그 영혼은 너무나 존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계시든지 교제하고 계시든지 혹 잃어버렸든지 여러분의 마음으로 작정하고 기도하는 한 영혼을 향해서 사도바울처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호소하고 간구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사랑의 간구, 사랑의 설득, 사랑의 요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워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사랑으로 간구하노라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16절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력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사도바울이 편지를 통해 부탁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에게 제발 오네시모를 종처럼 여기지말고 도망간 종처럼 여기지 말고 그를 나와 같은 형제로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과거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란 것입니다. 이제 그를 귀히 여겨달라고 빌레몬은 과거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사랑의 관점에서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1절에 보니까 오네시모가 전에는 내게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 당신과 내게 유익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라는 말은 유익하다 유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오네시모가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를 종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와 같은 사랑으로 그를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심복입니다. 그는 내 심복과 같은 내 심장과 같은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마치 내 분신과 같은 사람이라. 그러니까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마치 나 사도바울을 영접하듯이 오네시모를 받아달라고 빌레몬에게 간곡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지만 서로가 어떤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얼굴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예배시간대가 달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분들을 다 그리스도안에 동역자로 형제와 자매로 존귀히 여기십니까. 아니면 친한 사람들끼리는 친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누가 있는가 보다 저사람 어디서 오는가 보다 이렇게 여기시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교회에 예수를 믿은지 오래된 분들도 있고 얼마되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분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많이 배운 지식층도 있을 것이고 많이 배우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안에는 형제와 자매외에는 없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그것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와 한 자매로 영접받아야 될 조건과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 도망간 노예라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노예 한 사람을 위해서 편지 한 장을 보낼 정도로 그 영혼을 고귀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속에도 부끄러운 이야기도 있고 자랑스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울에 승동교회라고 있습니다만 그 교회의 역사속에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처음 세워지고 그 교회는 양반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천민들도 교회를 나오고 예전에 짐승을 잡는 백정이라는 이런 분들은 천한 직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정과 같은 직업을 가지신 분들도 그 교회에 나온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정가운데 정말 믿음이 좋고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 많이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장로선거를 했는데 양반이 장로가 안되고 백정 그분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큰 시험이 들었습니다. 양반 장로님들이 화가 나서 이런 상놈하고 우리가 어찌 같이 당회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양반만 모이는 교회로 갈라지고 상놈만 모이는 교회로 갈라졌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록 사회에는 그런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를 수용하고 모두를 영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속에는 또 하나 자랑스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김제 금산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역사속에 유물로 남아있고 ㄱ자 교회로 유명합니다. 그 마을에 선교사가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조덕삼이라는 마을 유지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장소가 없으니까 자기집을 교회로 내놨습니다. 자기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습니다. 자기집에 머슴 이자익이라고 있는데 마부입니다. 소나 말도 돌보고 허드렛일도 하는 머슴이 있는데  그 머슴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부흥되서 장로선거를 했는데 당연히 주인인 조덕삼씨가 되어야 하는데 조덕삼씨가 안되고 머슴인 이자익씨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술렁거립니다. 어찌 주인을 내버려두고 머슴이 장로가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때 그 분위기를 알고 주인 조덕삼씨가 일어나서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이자익 이 분은 참 훌륭한 분입니다. 비록 우리집 머슴이지만 장로의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너무너무 존경스럽고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이분은 장로감 입니다.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되어지고 머슴인 이자익씨가 장로로 취임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역사속에. 그 다음에 교회가 부흥되어 장로선거를 했는데 이번에는 조덕삼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덕삼씨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목사님이 계셔야 하는데 목사님이 없습니다. 이자익 이 장로님은 아직 젊고 유능하니까 이분을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가 되게 합시다. 그래서 자기가 돈을 내서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시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이자익 장로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서 김제 금산교회에와서 목회를 한겁니다. 머슴이 목사가되고 주인이 장로가되서 열심히 목사님을 섬기고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역사속에 훌륭한 교회로 남는 겁니다. 

어찌보면 이자익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 누굽니까? 조덕삼장로님이 더 통이크고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후손들이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조덕삼장로님의 후손이 누구냐 후손중에 유명한 국회의원인 조세형국회의원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안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에 얼마되지 않아 정착하지 못한 새가족들을 더 사랑의 눈길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한번더 말걸고 한번더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 뭉쳐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의 눈길로 모두를 바라볼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18절 19절입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래도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섭섭한 것이 있을까봐 재산상의 손해도 끼치고 떠났으니까 만약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빚진것이 있으면 내가 다 갚아주리라. 내가 계산하리라 이런 말입니다. 

19절에 내가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친필로 싸인까지 하고 있으니까 내가 틀림없이 당신에게 오네시모가 진 빚을 갚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책임지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데 그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위해서 그의 안전을 위해서 그의 회복을 위해서 그의 용서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부채까지 사도바울이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게 사랑의 헌신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했으면 그 영혼을 끝까지 책임져야 될 줄 믿습니다. 그 영혼을 위해 기도로 책임지지만 동시에 물질로도 시간을 내어서라도 우리는 그 영혼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을 탕감한다는 의미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빚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값을 담당하셨듯이 우리가 형제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고 그의 부채를 담당해준다는 것 얼마나 의미있는 일입니까. 그로 인해서 에베소의 한 위대한 감독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는 강도 만난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자기는 사마리아인이고 이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수, 불구대천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다가가서 그를 싸매여주고 그는 자기 나귀에 태우고 주막집까지 안내해 줍니다.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길이 바빠서 떠나야 하지만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다 갚아주겠습니다. 내가 그것까지도 책임지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지는 헌신과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작정한 영혼, 내가 때로는 물질의 손실이 있을지라도 그 영혼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세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시찰회세미나를 할 때도 예닮교회 지인성 목사님오셔서 울지마톤즈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했습니다만 울지마 톤즈 보신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프리카 오지 수단남쪽에 톤즈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가난과 전쟁과 절망으로 찌들어진 이 마을에 한 의과대학생이 단기선교를 왔습니다. 그분들을 돕고 치료해주면서 정이 너무나 들었습니다. 떠날 때 다시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돌아올 것입니다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그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의 감동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그는 신학대학을 갑니다. 가톨릭신학대학을 나오고 신부서품을 받습니다. 그래서 의사요, 신부가 되어서 약속했던 톤즈라는 마을을 찾아갑니다. 그 마을에서 몇 년동안 섬깁니다. 그들을 위해 갖은 노력과 헌신을 하고 치료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치고 그리고 학교를 만들고 밴드부를 만들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일을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그들에게 베풀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건강이 안좋아서 검사를 했더니 대장암 3기입니다. 결국 이태석신부는 대장암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촬영팀이 이태석신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톤즈라는 아프리카 작은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의 죽음의 과정들, 영상을 주욱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들, 한센병자들이 있는 구석마을에 가서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보여줄 때 그들이 사진을 보고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진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더듬고 그렇게 합니다. 

이태석신부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행했습니까 물을 때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옷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아플 때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슬퍼할 때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기도를 배우고 싶어할 때 내게 기도를 가르쳐 주엇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태석 신부는 사랑으로 그분들을 섬긴 것입니다. 끝까지 그 영혼들을 책임지고자 자신의 삶을 드렸던 위대한 신부였다고 선교사였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영혼이라면 그 영혼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그런 희생과 헌신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네시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만 나중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아십니까. 네로 황제가 집권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는데 그 당시 두사람의 감독이 나란히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에베소교회의 감독인 오네시모였고 또 한사람은 골로새교회의 감독인 빌레몬이였습니다. 오네시모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빌레몬도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골로새교회의 위대한 감독이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손잡고 장렬한 순교로 그들의 생을 마칠수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식들을 위해 봉사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갑니다. 주님앞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가치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우리는 눈물로 헌신으로 섬겨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사랑의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랑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일들을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오늘도 한 영혼을 위해서 한 영혼의 정착과 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눈물로 간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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