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5) (계 3:1-6)

첨부 1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5) (계 3:1-6)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한 사명를 맡기십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그 사람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어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물러설 줄 모르십니다.  "내가 안 한다고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리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극히 교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부족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건강하고 올바른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깨어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위기의 한 밤 중을 지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런 다짐을 합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예수님은 다가오는 자신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제 이튿날이면 일어날 중대한 사건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나와 함께 기도하자."(막14:34)

사도 바울은 거대한 세속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시기를 알거니와 지금은 자다가 깰 때다."(롬13:11)  뿐만 아니라 그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통해서 사도 요한도 영적으로 죽어가면서도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1세기에 존재했던 한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깨어나셔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어"라고 했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3절을 보면,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깨어남'(wake-up)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깨어나라고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무시는 분이 계십니다.  목사는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 시간에 주무시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주무시고 있는 한 여 집사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옆에 있는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좀 깨우세요"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이렇게 혼자서 독백을 했다고 합니다.
"지가 재워놓고 누구보고 깨우래."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우리 주님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말해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 사데 교회의 사자인 지도자에게 편지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을 보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곱 별은 지도자를 말하는데, 그 지도자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를 지도자에게만 맡겨놓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지도자를 친히 붙들고 교회를 운행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먼저 주님의 손에 붙잡히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일곱이라는 것은 완전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지금 이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운명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의해서 성령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던 사데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시의 사데라는 도시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65Km 지점에 존재하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기원전 700년부터 546년까지 사데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사용했던 부의 상징이 되어온 도시였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의 이 도시에는 78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기둥을 건장한 장년 두 사람이 껴안아도 부족할 만큼 거대한 돌기둥입니다.  헤로도투스는 "당시의 사데는 이 신전을 중심으로 연회와 오락, 그리고 축제가 끊임이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치한 무역도시의 분위기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교회를 세속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의해서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데 교회의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복음이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사치나 쾌락이나 재물이 그들의 소망으로 착각되기 시작한 교회였습니다.  영적인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서 이들 일곱 교회들에게는 나름대로 칭찬이 있었고, 책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를 향해서는 별로 칭찬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칭찬이 아니라 책망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 하반부를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칭찬을 전혀 받지 못한 두 개의 교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데 교회였습니다.  그만큼 도시의 세속화가 이 교회를 부패시켰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네 개의 교회는 안팎으로 핍박과 고난과 시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강요를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니골당과 같은 이단의 위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의 박해도 없었고, 죽음으로부터의 위협도 없었습니다.  사데 교회에는 어떤 박해나 시련이나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여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데 교회는 분명히 부흥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칭찬이 가득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부흥하기는 커녕 오히려 쇠잔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정말로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그러나 안에서는 실상 썩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활기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데 교회에 심판자로 서 계시는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에는 이름뿐인 신자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서 소위 '명목상의 교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사데 교회 교인들의 상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이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실상 죽어 있었던, 그래서 영적인 시체로 진단 받은 교회와 교인들, 그들이 바로 사데 교회와 그 교인들이었습니다.

성경에 특별히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유사한 책망을 받았던 종교적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아주 괜찮은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배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엄한 표정을 하고 걸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거룩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면 목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거룩하게 하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 가운데도 어떤 사람들은 거룩이 목소리에 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마치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썩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랐습니다.  사람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23:27-28)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장식했지만 속에는 썩은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인 외식자들이었고, 종교적인 위선자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겉으로만 나타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나타나는 전시적인 활동에서 내 신앙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나타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데 교인들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깊은 내면을 끌어안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인격이 변해서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겉으로 전시된 활동주의에서만 신앙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사데 교회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자신의 속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내 안의 황폐한 모습을 그대로 둔 채로 겉으로 무엇을 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사데 교회의 비극이 남의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내면과 인격에서 발견하셔야 합니다.  자기의 속 사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사람 앞에서만 무엇을 과시하는 소위 활동주의에서 찾고자 한다면 사데 교회의 비극은 오늘 이 시대 여러분과 저의 비극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에는 칭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칭찬할 것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희망의 싹은 있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 번째로 사데 교회의 희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우리가 여기에서 희망을 주는 단어 하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은 바"라는 단어입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있었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있었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함께 동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화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벌써 주님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교회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죽어져 가는 세상을 살릴 세상의 소망이었습니다.

아주 우연한 일치일는지 모르지만 사데(Sardis)라는 도시 이름이 그리스어로 그 뜻이 '남은 자'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교인들과 다르게 그들은 세속화를 거부하고 거룩한 삶을 열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을 구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소망을 구했습니다.  이 거룩한 소수를 가르쳐 4절에서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평소 주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세상을 약삭빠르고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바보라고 왕따 당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당하는 왕따의 의미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따, 왕을 따르는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당당히 왕따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역사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역사에 유일한 희망의 그루터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자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거룩하게 변화되어 그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건물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프로그램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이벤트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뜨거운 영성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도덕성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자산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뜨거운 영성과 거룩한 도덕성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깜짝 프로그램을 많이 하고, 화려한 건물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성의 빛남이 없다면, 그리고 세상 사람과 차별화 될 수 있는 거룩한 도덕성이 상실되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존재할 필요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빛을 비출 수 없다면 그 빛은 존재의 필요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렸다면 소금으로서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당시에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로마에 살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 로마에게서 배우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로마를 본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영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감화력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는 교회는 바로 이 영성과 도덕성으로 충만하여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공동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데 교회를 통해서 배워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사데 교회는 1세기에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1세기에 존재했던 그 교회를 통해서 오늘 21세의 우리들의 교회가 붙잡아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깨어있는 교회, 깨어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21세기의 오늘의 교회가 1세기의 사데 교회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성도는 깨어있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는 깨어있는 성도들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여기에 보면,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그것은 "네 행위에 충만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이고, 도덕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 안에서 보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깨어 있는 성도는 주님의 영성과 거룩한 도덕성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깨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성과 도덕성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 3절이 그 대답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여기에 보면 중요한 동사가 세 개가 나옵니다.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  우리가 영성을 회복하는데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경고를 다시 둘로 요약할 수 있다면 깊이 생각하고 깨어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던가, 아니면 자신이 깨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면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깨어 있음의 자리에 다시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기 이 사데 교회라는 공동체를 향해서 주님께서 권면하시는 메시지의 열쇠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데라는 도시는 사데 도시의 역사에서 과거에 그들이 깨어 있지 못함으로 한 때 멸망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통치자가 B.C 560-546년까지 통치했던 크로에수스입니다.  이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신흥제국이었던 페르시아에 의해서 침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데라는 도성을 에워싸게 됩니다.  그런데 리디아 왕국의 국민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데라는 도시 자체가 난공불락의 아주 천연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만 벌면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에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 성의 남쪽의 맨 끝에는 아주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절벽 쪽으로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디아의 한 군사가 절벽 쪽으로 철모를 떨어뜨렸는데, 이때 페르시아의 한 장수가 그 모습을 보고 바로 그곳을 공략하여 이 사데 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사데의 장수들은 멸망하던 밤까지 리디아의 군사들에게 "리디아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공언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서도 파티를 벌였습니다.  쾌락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는 수비하는 군사 외에는 잠잘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 잠이 죽음의 잠인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에 그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한 순간의 방심이 리디아의 멸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과거를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은 뼈아픈 이 역사를 잊어버렸습니다.  페르시아로부터 300년간 통치를 받았던 사데는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사데에 대한 통치권 쟁탈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안디오쿠스가 자기의 라이벌이었던 아케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아케우스가 난공불락의 사데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일년 동안이나 안디오쿠스는 그곳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라고라스라는 한 군인이 과거 페르시아 때에 이용했던 그 묘안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용감한 특공대원들이 험한 절벽을 기어올라갔는데, 그곳에는 보초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깨어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사데가 멸망했던 그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희망이어야 할 사데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한번 세속화의 어둠 속에서 방심하며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이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방심했을 때,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덮쳐서 저와 여러분을 포로로 삼을 수가 있다는 사실 앞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과 여유, 그리고 환경적인 축복이 마치 나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것처럼 자기 만족의 영적인 잠 속에 빠져 들어가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죽어가고 있는 거야."
"네 영혼은 죽어가고 있는 거야."

오늘의 교회를 마케팅의 방식으로 진단하며 연구하는 학자 중에 조지 바나(George Barna)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주전자 속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전자 속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개구리를 집어넣은 다음에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기분 좋게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이런 처지에 높여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우리가 영적인 무장을 풀어버리고 안일의 잠을 자고 있었을 때 죽어 가는 줄 모르고 기분 좋게 죽어가고 있는 개구리, 그것이 여러분의 모습일 수가 있고, 그것이 나의 모습일 수가 있고,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상태라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 말고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다시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켜야 할 때입니다.  다시 우리의 도덕성을 흔들어 깨워야 할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깨어서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민족을 깨우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울면 내 가족들이 울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울면 우리 교회가 울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울면 우리 민족이 울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가 이 안타까운 모습을 바라보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족은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아직도 희망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로 영성을 깨우는 성도들의 모습,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는 보고 싶어하십니다.

동화작가 정채봉이라는 분이 쓴 새벽을 예찬하는 새벽 편지의 한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벽 눈물은 사기꾼이 흘리는 것이라도 진실처럼 믿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깨어서 기도하는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을 끌어안고, 우리의 친구들을 끌어안고, 우리 시대의 암담한 현실을 끌어안고 기도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내 자녀를 끌어안고, 내 가족을 끌어안고, 내가 섬기는 이 교회를 끌어안고 눈물의 씨를 뿌리십시오.  기도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깨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도 깨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도 깨어날 것입니다.  영혼의 깊은 잠에서 일어나 다시 깨우십시오.  다시 기도를 붙잡으십시오.  다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 삶의 현재의 모습을 통찰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교회는 깨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역사를 깨우십시오.  지금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다시 흔들어 깨워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귀 있는 자는 오늘 성령이 교회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