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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얼굴을 찾으라 (시 2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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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을 찾으라 (시 27:7-14)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의외로 철학적이나 추상적인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방식을 쓴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반복입니다. 반복을 통해서 지극히, 또 최상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왕 중의 으뜸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왕의 왕’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가장 뛰어난 왕이라는 말을 쓰고 또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룩, 거룩, 거룩, 거룩이라는 말을 세 번 반복했습니다. 가장 거룩하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물리적인 표현을 통해서 정신적인을 것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살을 쏠 때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 그 빗나간다는 표현을 가지고 죄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또 남의 땅을 침범한다는 표현을 가지고 불법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식은 신체 부위를 가지고 신앙적인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하나님의 팔’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다’라는 말은 기도를 응답하시다 라는 뜻이고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버린다, 멀리한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말은 은총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눈코입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인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가와 같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찬송가에 500여개의 찬송가가 수록돼있는 것처럼 시편에는 150편의 찬송시가 수록돼 있습니다. 다만 가사만 있고 악보는 없습니다. 아마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보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악보가 없이도 어떻게 부르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 고유 판소리가 악보가 없이도 보존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시편 저자는 하나님에게 못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하나님 앞에 솔직한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어보면 ‘내 원수의 이를 부러뜨려 달라’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실 때가 있습니까. 내 원수의 이를 부러뜨려 달라. 또 ‘원수가 자기 꾀에 넘어가게 해 달라’ 이런 솔직한 표현이 등장하고 또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참아야 됩니까, 어느 때까지니이까, 내 눈물이 내 밥이 되었나이다, 내가 여름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런 식으로 하소연하는 구절도 있고 또 하나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어느 때까지 흥하리이까, 하나님은 언제 역사하시나이까’ 이런 식으로 딱 부러지게 물어보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어느 대목에서는 아주 스위트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만나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마지막 대목을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고 하소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어떤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참 예배의 표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를 논할 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간절히 구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증거로 내세웁니다. 

아니면 좀 더 철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토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불의함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또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든 사람이 없이 만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 만물을 보면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디자인한 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직설적이고 본능적인 방법이 있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존재를 느낍니다. 사람이 나와 같이 방안에 있을 때 내가 그를 보지 못하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느껴본 사람은 압니다. 어떻게 그것을 느끼느냐고 물어보기 보다는 왜 그것을 못 느끼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더 강하게 느끼고 어떤 때는 덜 강하게 느낍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낍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또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낍니다. 반대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음의 괴로움을 통해서 역설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순종할 때 마음의 불편함을 통해서 역설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방법으로든 부정적인 방법으로든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면서 삽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억지로 부인하고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인위적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본능적인 것이고 천성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몸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히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이 기뻐하시는 것과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과 성령이 충만한 것과 영적으로 메마른 것과 이런 모든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때도 있지만 덜 강하게 느낄 때도 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산소가 부족하면 우리의 몸이 불편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줄어들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느낌으로 그만큼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반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운동이 시작되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순복음교회를 통하여 소개되었을 때 거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성령운동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또 하나님을 신령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마는 곁길로 빠지는 바람에 그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곁길이 바로 기복신앙으로 빠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성령운동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 많은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을 복을 구하는 쪽으로 빠져버리는 바람에 원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빗나가버린 것이 많이 있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부흥 ․ 은사 ․ 예언 ․ 방언 이런 은사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고 섬기고 하나님을 즐기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변질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내용을 살펴보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기도를 하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쇼핑 목록과 같을 때가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왜 기도를 지루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늘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빤한 얘기입니다. 누구에게 복 주시고 뭐 하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빤한 얘기….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제목을 보면 아마 이름만 바꾸면 복사만 해도 될 것입니다.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 내용을 보면 마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멘 할 때는 send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가 비즈니스가 돼 버렸습니다. 

너무 메마르고 건조하고 기도생활이 재미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를 해야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너희 천부께서는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르시느니라’가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너희 천부께서는 아시느니라’,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모르시느니라고 읽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리마인드 하려고 합니다. ‘주님, 저에게 과년한 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실까봐. ‘하나님, 저에게 고3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실까봐. 알고 계세요. 우리의 기도가 괴롭고 지루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지루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부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염려 때문에 아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기도생활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비즈니스, 딜링이 돼 버렸어요. 뭔가 내가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구해야 되는 이런 아주 무미건조한 행위가 돼버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을 되풀이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럼 뭐라고 기도하라는 말이냐. 이게 관건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8절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느끼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게 해 달라. 이건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저절로 영적인 느낌을 갖지는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침에 일어날 때 ‘아,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5분만 더 자자. 오늘도 직장에 출근해야 되는구나, 아, 오늘도 학교가야 되는구나.’ 다들 힘들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입을 열어서 ‘하나님, 오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여주심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산성이시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 되시나이다.’ 

이미 빤히 알고 있는 얘기를 왜 되풀이하라는 얘기냐.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건 백번을 말해도 부족합니다. 내가 누구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야 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우리의 입술로 선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빤한 얘기에요. ‘나는 하나님의 양이요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나이다. 오늘 내가 주님을 기뻐하게 하시고 내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이 땅에서 의로운 자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인 기능이 개발되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많은 세월의 교육을 통하여 지적인 기능이 발달했고 또 예술이라든가 미술이라든가 문학을 통해서 감성적인 기능이 많이 개발됐는데 한 부분이 소홀함을 받았어요. 영적인 기능입니다. 이것은 교육으로도 안 되고 예술로도 안 되고 감정으로도 안 됩니다. 선한 의도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개발될 수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훈련을 받는 목적 중의 하나는 물론 성경을 배우기 위함도 있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지고 영적으로 자라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교회생활을 하고 똑같은 예배를 참석하더라도 영적인 기능이 부쩍 자라나는 사람이 있고 세월이 지나고 지나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 그 사람의 열린 마음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 말은 우리의 예배에 영적인 차원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몸으로도 느끼고 우리의 감성으로도 느끼고 지적으로도 느끼고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느끼지요. 
제가 LA에서 교육전도사를 할 때 청소년들이 부르는 찬양곡 중에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어느 곡보다도 더 확실한 내용의 곡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God is not dead-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He''s alive-하나님은 살아계신다. 
I feel him all of me-나는 내 몸 전체에 그분을 느낀다. 
I feel him in my hand-내 손에 그분을 느끼고, 
I feel him in my heart-내 가슴에도 하나님을 느끼고, 
I feel him in my head-내 머리에도 그분을 느끼고, 
I feel him in the street-길거리에 갈 때도 그분을 느끼고, 
I feel him in the school-학교에서도 그분을 느끼고, 
I feel him all of me-내 몸 전체에서 그분을 느낀다.’ 

이건 그냥 어린이들 재미있으라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지은 곡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느낄 때와 느끼지 않을 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 사람은 담대해지고 즐거워지고 평안해지고 또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게 되고 그리고 신비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가 굳이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아도 내 현재 이 모습으로 족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가면 사람은 초조해지고 두려워지고 염려하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 저자도 9절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이 말은 임재를 거두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못 느끼는 경우, 내가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 그건 얼굴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것은 죄인의 실존이에요. 반대로 구원받은 자의 실존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치유하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머리에 털 나고 그런 거 경험해 보지 못했다? 

여러분은 인생의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이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설교해야 그 설교가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찬양인도를 하던 찬양을 부르는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면서 노래할 때 그 노래가 그냥 노래가 아니고 거기에 영적인 차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전도를 할 때에도 그냥 말로, 논리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해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뭔가 사람이 회심하고 거듭날 수 있는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이든 기름부음이든 은사든 이런 모든 것은 결국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물댄 동산처럼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구하기 이전에 주님이 명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나와 교제하자는 얘기에요. 나와 fellowship하자는 얘기에요. 이건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여기에서 많은 의구심이 사라집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많은 의구심이 생기는 이유는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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