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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는 기도할 때입니다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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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도할 때입니다 (눅 22:39-46)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갑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직장생활이 점점 불안해 지고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문제 그 자체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방법,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 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삶의 뒷골목에서는 마냥 불안해하고 근심을 더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어떤 방법도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정면 돌파하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 앞에 자학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불평하거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면을 쓴 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게셋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예수님의 기도를 눅22: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무엇을 따라 그가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습관’ 우리에게 습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를 성공과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쁜 습관은 성공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축복된 삶을 어그러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예수님의 습관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기도하는 습관이셨습니다. 그가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그의 일상의 습관이셨고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아니 그분의 삶의 거룩한 리듬이셨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일상의 삶의 방식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기도를 호흡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습관적으로 하며 삽니다. 그러나 호흡을 멈추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생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바로 그런 생명의 호흡이라고 가르칩니다. 제가 지난주 한 주간 머물고 있던 기도원 필그림 하우스의 맞은 짝에 보면 가평 루디아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랜 세월 섬기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엔 과거에 아나운서로도 유명했던 지금은 실명을 한 서천석 원장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화요일에 그곳을 가 보았는데 뇌성마비로 중중 장애자로 사는 50여명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엔 방마다 중증 장애자로 1급과 2급 지체자들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한 분과 간호사들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방을 들어서는 순간 아이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호흡 곤란이 온 것입니다. 

주로 여기 온 중증 장애인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근육 무력증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근육 무력증이 무서운 것은 호흡기능이 점점 약해져서 호흡관이 좁아지고 또한 폐가 오므라들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죽어가는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가 너무 힘든 병입니다. 당사자는 물론, 그 옆을 지켜보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고통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호흡이란 산소를 들이쉬는 것만이 아니라 몸속의 필요 없는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근육 무력증 환자가 점점 호흡이 곤란해 질 때 산소를 들이키기는 하지만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속에 이산화탄소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농축된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산소마스크를 씌우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몸속에 농축되어 있는 이산화탄소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진통제를 맞지 않고는 잠시도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산소마스크는 저 발밑에 놓아 둔 채 말입니다. 

흔히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그 무엇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영적 노폐물, 죄악의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빼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받고, 내뿜는 이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적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그날 밤 그의 기도는 그분의 일상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본문 눅22:44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의사 누가가 동원한 수식어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땀이 핏방울 같이” 지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을 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히5:7절의 말씀이 그 밤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왜 이처럼 처절하게 통곡하시며 몸부림을 치지 않으시면 안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감당하시기엔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당연히 죄를 지어 사망의 선고를 받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수로 그 죄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까?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끌어안으시고 죽기위해 눈물로 통곡을 하시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거는 기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주변을 보세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구제역으로 소, 돼지 등 300만 마리가 산채로 매장까지 되는 그 현실 속에 그리고 그로 인해 커다란 환경오염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실 앞에 우리가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라 생각 하십니까?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미래가 안보여 타락의 길을 걷고 이곳저곳 직장에 원서를 내보지만, 결국 몇 번의 좌절 속에 꿈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택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손을 들어 눈물을 뿌리며 기도 할 때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 땅, 통일의 염원은 멀어져만 가고 있는 이 시대,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함께 간 제자들을 향해 기도에 전념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40절에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뭐라구요? 그러나 이 위기의 현장에서 기도하러 온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45-46절입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위기의 상황, 그 기도에 동참하면 승리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그 위기의 현장에서 기도하는 대신 자신들의 감정과 환경에 매여 절규하는 주님의 음성을 가까이 하면서도 잠에 빠집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 없이도 잘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되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의 최대 약점은 '영적 위기감'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편한 것만 좋아하고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면서도 큰일난다는 위기의식이 없음이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니느웨를 위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망각으로의 도피! “에라 잠이나 자자.” 도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한 구약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슬픔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들이 자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보면 그분은 일생의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의 공생애를 광야의 기도로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을 택하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시고자 그들을 밤바다에 보내놓고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하루 종일 가버나움 동리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지친 다음 날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그 날 어느 동리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계획하시고 결정하십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진실로 그분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십자가를 지심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이시고자 하는 영웅심리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원하심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눅22:42절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이 땅에 아들로 머무시는 동안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순종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 순종의 걸음은 기도 없이는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느 한 군데도 주님은 기도의 흔적을 남기지 아노은것이 없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연약한 인생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바로 기도의 사역이었습니다. 큰 기적을 베푸신 다음 그 분은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의 가르침이 권세 있는 자와 같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신비가 기도 가운데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이런 신비가, 이런 비밀이 나갈 수가 없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정말 기도하지 않으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은 평생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감당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굶주림과 마귀의 지독스러운 장난 앞에서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7마디는 바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더할 나위가 있습니까? 지금은 정말 기도의 줄을 붙잡고 더욱 더 주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2001년 6월, 미국의 오클라마호마 연방청사에 폭발물을 장치해 무고한 168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티모시 멕베이가 독극물 주사로 사형을 당하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의 행동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는데, 죽기 직전, 영국의 윌리엄 어네스티 헨리의 시를 인용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언뜻 들으면 굉장히 멋있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반 기독교적입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선장도 하나님이십니다. 티모시 멕베이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 인본주의 사상의 결과 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기독교 영성 작가인 필립 얀시는 ‘Ctristinanity Today'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의 불행은 단순히 한 청년의 인생을 잘못 살아온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고무된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이단 사상의 피해자로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심장한 이야기를 기고합니다.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추방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나의 연약성을 내개 안다면,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호흡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겸손히 깨달았다면, 기도를 배우십시요” 

다음 주일부터 온 가족 부흥성회가 열립니다. 금번에는 “인생의 반전을 꿈꾸라”는 주제로 삼손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때 실패의 자리에 서서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매여 연자 맷돌을 돌리는 세상의 치욕을 당하는 아픔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인생의 반전에 성공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의 조롱거리처럼 버려진, 그 자리에서 그가 일어설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로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고 그 줄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부흥회는 우리에게 영적인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배의 회복입니다. 주일부터 시작을 해서 수요일에 마치는 8번의 예배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번 기회에 영적 게으름을 몰아내시고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영적 진단을 받으십시오. 아산 병원에 가면 종합진단 센타가 있는데 2박 3일 동안 들어가서 몸의 모든 검시를 합니다. 그런데 자리가 없어서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렇게 사람이 미어터집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검사비가 1000만원 이상 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드려서라도 자신의 건강에 온통 신경을 씁니다. 제가 이것을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보다 영적인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분이라면 이번에 시간 조절을 잘하셔서 예배의 회복에 힘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2) 사역의 회복입니다. -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학교 교사. 찬양대. 전도기관. 여러 제직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역을 다시한번 점검하고 사명의 회복이 되어지는 시간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가르치는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될 때에 이미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장지기들의 경우에도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그곳에 가장 위대한 사역이 지금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지금 제직들 가운데 정상적인 기도 생활을 얼마나 하는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젠 모든 제직이 기도의 회복이 일어나야 겠습니다. 

3) 헌금 생활의 회복입니다. 저는 부흥회 때마다 옥합을 깨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옥합을 여는 분들을 보면 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질이 있어서 드리고, 없어서 못드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최선을 다 한 분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드림은 그의 일생을 다 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여러분에게 함께 기도를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본당은 IMF때 그 힘든 시절에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옛날 구조로 이 강대상이 엄청 높았고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런 본당과 로비, 지하 식당, 그리고 벧엘 전까지 지금 생각하면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5억원의 공사비를 드려 이 강대상부터 의자, 모든 공조,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때, 원로 목사님은 당신의 퇴직금을 교회에다 헌금을 다 하셨습니다. 모든 장로님들이 동참했습니다. 아이들도 함께 저금통을 깨트려 헌금에 동참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뜬히 은혜로 감당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을 합니다. 이 1000만원이 넘는 강대상를 한 성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수천만 원이나 든 이 예배당의자... 당시 우리 교회 같은 옛날 건물을 가진 교회의 목사님들이 전국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를 와서 리모델링을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 이 마이크 시스템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니까 악취가 나고 문짝이 너덜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사는 집이라면, 이렇게 하고 살 수 있을까? 뭐, 여행객이라면 잠시 쉬어가는 화장실이 불편해도 잠깐 눈 한번 찡그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젠 모든 시설이 점검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혹시 예물을 준비하시기를 원하시면 기도하시고 겸손하게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의 몫이 아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이 소중한 기회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기도원에 머물면서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은혜가 강같이 흐르는 그래서 이번 부흥 사경회를 통해 기도의 회복이 일어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넘쳐지기를 그리고 성령의 체험과 영혼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서 모두가 변화되는 축복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해왔습니다. 이제는 기도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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