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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알고 ... (요 1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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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알고 ... (요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내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나 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 그분은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내가 양을 알고 ..” 라고 했습니다. 
시편 139편에서도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음으로 나를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살펴보셨다는 것은 자세하게 감찰과 조사 결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 되시기에 우리를 자세히 살펴보십니다. 

예전에 어렸을 적에 시골집에 소를 키웠습니다. 소를 키울 때 아버지는 아침마다 여물을 주고 외양간에서 밖으로 끌어다가 소를 매셨습니다. 그때 마다 소의 몸을 찬찬히 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의 몸에 달라 붙어서 기생하는 진드기 벌레를 잡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석 구석 털 속에 밖혀서 잘 보이지 않는 기생충을 찬찬히 살피고 조사하여 소의 몸 상태를 날마다 살펴주셨습니다. 
사람이 키우는 짐승도 그런데 하나님을 짐승을 키우는 사람에게 비하겠습니까?
자신의 양된 성도들을 목자되신 주님께서 자세히 조사하시고 감찰하셔서 세밀한 것 하나까지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보다도 나의 사정을 더 잘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내가 내 양을 알고 ... 라고 하셨는데 양된 우리의 무엇을 아신다는 말씀일까요? 

1,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양은 가장 약한 짐승입니다. 내가 양을 알고 한 것은 양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떤 부분에서 가장 강한 것 같으나 사실은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오늘의 결심이 내일에 가서 변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롬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모든 사람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도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39:4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의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강하게 해 달라든가 자기를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지혜를 구하든가 물질적 축복을 구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꾸로 기도하였습니다. 엉뚱하게 그는 자기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다윗이 잘못 기도를 드린 것 같지만 그가 참으로 귀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예수 사랑하심은 이란 찬송(563장) 이 있습니다. 그 찬송의 3절에 보면 “내가 연약할 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 
저는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보신다는 그 가사가 왜 그렇게 은혜스런지 모릅니다. 
아마도 누구보다 더 연약함이 많아서 그런거 겠지요.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서 그 연약함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응답이 무엇입니까?
고후 12:9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나의 연약함이 도리어 온전하게 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크게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9절 하반 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누구나 자신의 모습 중에서 좋아하는 모습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의 모습 중 많은 부분을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은 뭔가 부정적이고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 쉽습니다.

사랑받는 모습은 대체로 강하고 수려한 것들이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모습은 약하고 못난 모습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더 강하고, 잘나고, 수려해지길 바랍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다 갖춘 것 같은 사람도 내면에는 자존감이 낮아서 비밀스런 고민을 하며 살기도 하고, 별로 갖춘 것이 없는 사람인데도 자신을 사랑하며 배짱 좋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나의 모습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일까요? 
타고난 성격, 환경의 영향 등이 있지만, 그 중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나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수용했나가 참 중요합니다.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연약한 점도 용납 받으면서 자란 사람은 그 기준이 내면화되어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의 연약함을 용납해야 합니다. 

연약함의 용납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연약함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그 모습을 미워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약함을 일체 부정하는 사람은 남의 연약함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 연약함을 용납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자신의 연약함을 용납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 자신의 연약함을 다루는 방식과 남의 연약함을 다루는 방식은 일치합니다. 자신 안에 용납 받지 못하고, 억압되어서 학대받고 있는 어떤 연약함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자식에게서 같은 연약함이 보일 때 마음에 분노가 일고 그 연약함을 또 다시 학대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주 어린 때부터 연약함에 대하여 용납 받지 못하고, 연약함을 감추고 살도록 배우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연약함이 보이면 자기 안에 있는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다. 
이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용납하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연약함 그것이 주님께 나아가는 비밀의 통로가 되고 열쇠가 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2, 실수와 잘못을 아십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실수는 허물입니다. 잘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는 의미는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약 3:2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아셨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 당신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주님이 버리지 않았습니다. 실수라고 보기에는 정말 도가 지나칠 정도로 잘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실수했지만 그 실수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51:7절에서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서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51:9절에서는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51:11절에서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엄청난 실수를 해도 고쳐서 쓰시는 분입니다. 
상처받고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도 주님이 한번 만지시면 치료됩니다. 실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사람들이 용납 못할 실수와 잘못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울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용납하신다 해도 그 연약함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납을 구실로 나의 실수와 잘못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허물과 잘못을 아시고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나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용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위해 기도 합시다. 

3, 잘한 것도 알아 주십니다. 

마 25:21절에 나오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행복한 말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나의 잘한 부분에 대하여 침묵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주님을 섬기는 그의 자녀들의 잘하는 부분들을 소상하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한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 주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는 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는 한 번도 환호를 받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환호를 받을 것입니다. 작은 자가 크게 될 것이며 잊혀진 자가 기억될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했던 자가 면류관을 쓸 것이며 신실한 자들이 존경받을 것입니다.

하늘의 시상대에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승리자 그룹에 있는 엘리트 몇 사람이 서는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세상에서 시험과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묵묵히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약 1:12절을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중요한 것은 상을 받을 때는 반드시 시상대에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운동경기를 보십시오. 경기가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 본부석 앞에서 대회장이 직접 상을 줍니다. 아무리 운동을 잘하여 관중 흥분하고 있을지라도 경기 도중에 대회장이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 금메달을 목에 달아주지 않습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그들을 위한 시상대를 높이 만들고 그 위로 올라오게 한 다음 모든 사람들 우렁찬 박수소리와 나팔소리에 맞춰서 아주 영광스럽게 상을 받습니다.
이 땅에서 크리스천들이 살면서 선한 일에 남 모르는 수고를 많이 합니다. 

교회서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일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낙심이 되어 일을 그만 두고 맙니다. 이 사람은 말자면 상급을 이 땅에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상급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상 주실 것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믿음을 갖게 될 때 주님께로부터 위로가 임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복이 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상급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경기를 종료하고 주님의 시상대에서 영광스런 상 받음이 있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인간적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교인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신다는 믿음과 그날 주님 앞에서 상 받음에 대한 기대와 소망 때문에 움직이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본문을 다시 읽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양을 알고...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실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신다는 말씀은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실수와 잘못과 허물을 아시고 가만히 계실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셨고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벧전 2: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은 친히 담당해주시고 우리의 잘한 것은 잊지 않으시고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합시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살아갑시다. 상 주실 주님만을 사랑하고 따르는 신앙에 굳게 서시는 양정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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