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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야 너를 아노라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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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너를 아노라 (창 22:1-19)


수년전 미국의 한 마을에서 큰 강을 건너는 다리를 새로이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기념으로 멋진 계획이 발표됩니다. 다름 아닌 개통되고 그 다리를 100번째로 건너오는 자동차 주인에게 현금 천 달러와 많은 선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경찰, 취재기자,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중에 100번째 차가 다리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물론 그 자동차주인은 이러한 계획이 있는지 모르고 달려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 차가 다리를 건너오기를 기다리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리 저 끝에 도착한 차가 휙 유(U)턴을 하고는 돌아가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그 차가 왜 그냥 돌아갔느냐 하면 다리를 건너는 통행료가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현찰 1불이 아까워서 현찰 천불과 많은 선물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너를 알겠다"는 말은 인간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 몇 년 간의 교제 끝에 상대방을 알 수도 있고, 결혼생활 몇 년 만에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친구나 상대방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이제야 내가 너를 알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오랜 관계 속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주께서 인간을 향하여 "이제야 내가 너를 알겠다"고 하셨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지성과 전능성을 의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75세였고 그가 수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가운데 하나인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결박했을 때까지는 적어도 40-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토록 오랜 세월동안 한 인간 아브라함은 잘 모르셨다가 "이제야 너를 알겠다"고 하셨다면 이것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합리주의자들이 공격에 대답할 말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표현과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사역을 끝마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며 하셨던 말씀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어쩌자고 사람을 지으심에 후회하신다는 표현을 쓰셨을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셨다는 말은 범죄한 인간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표현한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간됨을 모르셔서 이런 과정을 거치신 것은 아닌 줄 압니다. 다만 인간편에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따금 어려운 시험문제를 인간 앞에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출제자도 하나님이시오, 감독관도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응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합격점수를 받으면 엄청난 축복이 따르는 중요한 시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는 기준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똑똑 소리가나는 똑똑한 사람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봐도 그렇고 이 종을 선택하신 것을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택하신 12명의 제자들을 보아도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진 학자나 부유한 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닌 한결같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버지집을 떠나라고 하시니 목적지 도 모르고 무조건 떠나버린 사람입니다. 애굽 왕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넘겨버린 어딘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전 죽어도 못 그럽니다.) 또한 백세에 얻은 귀한 자식을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죽여 번제를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두말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난 어딘가 나사풀린 사람과 같지 않습니까?(3절)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장을 부리거나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입은 한자나 삐쭉거리며 자리에 눕고 말았을 텐데,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명령을 앞에 일언반구도 없이 아침 일찍 모리아산으로 직행했다니 분명 모자라는 부 분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저 정도만 똑똑해도 물론 여러분은 저보다는 더 똑똑하시니까 우리가 만일 아브라함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에게 절호의 찬스라도 잡은 것처럼 모처럼 반격의 기회를 얻었기에 하나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조목조목 짚어가며 반박했을 것입니다. 

나는 같은 좀 모자라는 죄인이라도 적어도 다음 세 가지는 따져야 합니다. 

첫째,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문제입니다. 레위기18:21절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명기18:10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이런 귀한 생명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것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모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내 시간 전부를 바치고 내 있는 재물과 내 집문서를 바치라면 그래도 믿음 안에서 이해가 가겠지만 사람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성경을 위반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둘째, 계약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세번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들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 아들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이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을 파기하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순을 범하신다면 나 역시 모순은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그 어렵게 약속가운데 주시고 얻은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후손이 왕성하리라고 하셨 는데 그 약속은 어떻게 하고 그러니 절대로 명령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소유권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중동지방의 가장의 권한은 가히 신성불가침의 절대권에 속합니다. 가족도 가장의 소유이며 노예는 생사권을 갖고 있고, 모든 재산 역시 가장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내게 자식을 주셨지만 주신 다음에는 내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도 손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삭은 저의 재산목록 제1호입니다. 다른 것은 다 드릴 수 있지만 이 아들만은 그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이 정도의 항변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좀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따질 줄도 몰랐습니다. 원래부터 아브라함의 심성이 이런 사람인줄 아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덕을 보실려고 아브라함에게 이런 혹독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깊이 살펴서 우리의 신앙의 교훈을 삼아야 할 줄 압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종교(목록)에서 흔히 발생하는 人祭(사람제사)를 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비교하고 싶은 심정이 있었습니다. 모압에서도 (왕하3:26-27) "모압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애돔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게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스발와임의 경우에도 (왕하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림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인제가 있었고 가나안 사람들도 므깃도 골짝에서 몰록신에게 어린아이를 제사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이런 시험을 하십니다. 여호와증인의 사람들이 매일 같이 믿는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문서포교를 하는데 일종의 추적포교이며 얼마나 끈질기게 접근하며 이들은 이것이 상급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한 통일교 신자가 성전을 찾겠다고 월부책 장사를 하면서 꽃을 판다든지, 몰몬교의 청년이 장로직을 획득하기 위하여 자비로 국외선교를 한다던지, 동방교 신자가 대학정문에서 풀빵을 구워 일억원을 바치는 것을 볼 때 우리 성도들이 저만한 열심을 가졌을까 하는 비교심리가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도 이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자 하나님은 시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로 모순되는 명령에도 순종하는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모순투성이요 앞뒤도 안 맞고 약속도 아니었고 방법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가를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합리적이고 사리에 맞는다면 그 누가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이란 신학자는 일찍이 "모순된 고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 역시 청천벽력과 같은 모순투성이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출발 합니다. 요즘 흔히 대학입시에서 보면 입학원서 제출을 눈치작전을 벌입니다 마는 아브라함에게서는 그런 눈치작전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눈치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 보면 믿음도 사랑도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나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모순된 명령은 무엇입니까? 무조건 순종하실 믿음의 결단을 새롭게 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로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가를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천평저울에 하나님과 자식을 두면 과연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겠습니까? 아마도 열 명에 아홉은 자식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외아들 이삭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저울은 하나님쪽이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자식을 꽁꽁 묶었던 것입니다. 120세 가량의 연로하신 어른께서 20세 가량의 젊은 자식을 묶는다고 순순히 응할 자식이 오늘날 흔치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죽는 일에 순순히 몸을 내 맡길 자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었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사람의 모형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합니다. 예수께서 결박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본보기를 이삭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본성이 순종하는 이삭을 왜 묶었을까요? 묶지 않아도 거역할 이삭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묶었던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삭의 마음이 이삭의 결심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결박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줄 몰랐던 내 입을 봉 하는 것이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내 자신을 내 자유를 꽁꽁 묵어 주님 앞에 드릴 때 그것이 곧 온전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오랏줄로 나를 꽁꽁 묶어서 나를 꼼짝 달싹 못하게 묶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전에서 포목점을 경영하시는 어느 권사님 그 가게에 토요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목사님이 그 가게를 방문하십니다. 이유인즉 그 권사님 가게에는 십일조함이 있는데 그날 그때그때에 판매된 액수에 십일조를 떼어서 헌금한 것을 1주일에 한번씩 목사님께서 수금하러 가십니다. 그 권사님께서는 그 십일조함에 열쇠를 자신이 갖고 있으면 급한 일이 있으면 그 십일조 함에 돈을 꺼내 쓰게 될 것을 염려해서 아예 열쇠를 꼼짝달싹 못하게 목사님께 맡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씨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심정과 같다고나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내려치려 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황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드디어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하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의심은 죽는 길이요, 믿음은 사는 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이 고통스럽고 쓰디써도 하나님께서 결국 나를 해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약사발을 살겠다고 뿌리치면 우리는 죽고 맙니다. 


넷째로, 나의 가장 귀한 소유가 바쳐지는 제물을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내 것이 그대로 있으면서 입으로만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탈무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 임금님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옛날이야기에 보면 꼭 외동딸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제 임금이 포고령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공주를 살려주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고 자신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때 먼 지방에 세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첫째형이 마법의 망원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멀리서 그 포고령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형이 마법의 양탄자를 가지고 잽싸게 삼형 제를 궁궐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셋째가 마법의 사과를 공주에게 먹여서 공주를 살려 냅니다. 이제 3형제는 저마 다 자신이 공주를 살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때 임금께서 공주를 셋째에게 주어 사위를 삼았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마법의 망원경도 그대로 있고 둘째의 마법의 양탄자도 역시 그대로 남아 있지만 셋째의 마법의 사과는 공주가 먹고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교훈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소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칠 때는 제일 좋은 것으로 드렸고 첫 번째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내것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소유로 바꿔지고 내것이 없어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이래야 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만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눈치보지 않고 아침 일찍 결단을 내리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주님의 소유로 바꾸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그래서 '이제야 너를 알겠노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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