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보다 더 큰 이
- 김부겸 목사
- 117
- 0
첨부 1
2012년 3월 1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2장 38절~42절
설교제목 : 예수보다 더 큰 이
<영성 시>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8~42)】
<성경 이야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거부하셨고, 그 대신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동화 같은 이야기’였고, 또 하나는 남방의 여왕이 지혜를 배우고자 멀리서 솔로몬 왕을 찾아왔었던 ‘역사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 끝에 결론적으로 덧붙이시기를 “나는 요나와 솔로몬 보다 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오늘 성경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기적 이야기>
며칠 전 TV를 보니, 한 때 기적을 일으키는 소년으로 유명했던 사람이 나왔습니다. 20여년 전, 이 소년은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손에 신문지를 쥐고 있으면 그 신문지가 불에 끄을린 듯 검게 탔고, 손으로 씨앗을 감싼 채 입김을 불어넣으면 그 씨앗에서 싹이 올라왔습니다. 또 그 소년은 체중이 90킬로그램이 나가는 거구의 사람을 두 손가락으로 들어올렸고, 담배에 염력을 불어넣어서 눈 깜작할 사이에 순간이동시켰습니다.
오랜만에 TV에 등장한 이 소년은, 아니 장년은 “어린시절에는 생각이 맑고 순수해서 인지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고 복잡해서 인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도 했고, “평범한 사람도 어느 순간 갑작스레 초능력의 인간으로 변화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TV에서는 최근 젊은 경찰이 13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떨어진 20킬로그램 체중의 아이를 직접 받아낸 사건을 보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0킬로그램의 아이가 10층 높이에서 떨어지면, 그 무게가 4백 킬로그램으로 급증하는데 그걸 그냥 받아내는 것은 과학적 이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TV를 보면서 정리되는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초능력이나 기적의 사건들은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초능력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뭔가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 또 경험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성경 이야기>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 대신 이스라엘 신앙전통 속에서 오랫동안 구전(口傳)되어 왔던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던 일이었고, 또 하나는 남방의 여왕이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멀리서 솔로몬 임금을 찾아왔던 일이었습니다. 즉 예수는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하느님의 신앙과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는 삶을 살라는 권면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나는 요나나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제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어려서부터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솔직히 거부반응이 있었더랬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지만 이거 너무 시건방진 것 아닌가. 교만의 극치지! 이건 좀 문젠데.” 그렇게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나름의 공부와 배움을 계속해 나가면서, 예수의 이 말씀에 깃들어져 있는 놀라운 정신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 이야기>
최근 『근대 자아 최초의 자화상, 몽테뉴의 엣세』(이환 지음, 서울대학교 출판부)를 읽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권력의 세계에 권위주의가 있다면 정신의 세계에도 권위주의가 있다. 고대의 지적 거인들은 정신계에 군림하는 권위로서 신성시되었고, 근대 초기의 지식인들은 기꺼이 이 권위에 예속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아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오직 그것만을 믿고 그것을 유일한 진리로 세상에 전파했다. 몽테뉴는 이 정신의 예속, 정신의 소외를 개탄한다. 그는 정신을 꽁꽁 묶고 있는 모든 밧줄을 끊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지식이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에 의해 전달되고 또 전달받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주고 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일방통행의 순서는 오히려 뒤집혀져야 한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획득된 진리가 ‘자신의 진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진리란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진리는 전달할 수도 또 전달받을 수도 없으며 오직 스스로가 찾고 붙잡아야 한다. 몽테뉴가 고대의 스승들을 대할 때 견지한 태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270쪽~272쪽)】
우리는 흔히 스승들에 대해서는 ‘거대하다’고 평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작고 또 작다’고 평가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정신이 아닙니다. 아니 진리의 수행자가 가져야할 태도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진리의 수행자는 “스승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도전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나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다”고 선언한 것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오히려 진리의 수행자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 하는 마땅한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
우리 기독교가 걸어 온 길은 어떠했나요? 우리는 예수보다 더 큰 이가 되기를 추구했나요, 아니면 예수보다 더 작은 이가 되기를 추구했나요? 우리는 예수라는 분을 거대한 산 위에 올려놓아놓고, 우리들 스스로는 그 산 아래에서 ‘겸손하게’(?) 노닐었습니다. 이건 겸손이 아닙니다. 예수의 진리정신에 대한 배반이거나 태업이거나 게으름입니다. 저 높은 산 위에 계신 예수께서는 뭇 중생들이 모두 저 높은 산을 뛰어넘어 푸른 창공으로 도약하기를 소망하셨는데, 우리는 푸른 하늘은커녕 작은 산에도 오르지 못하는 - 오르지 않으려고 하는 나태함을 겸손함으로 치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기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응답은, 예전부터 들어왔던 모든 신앙적 영웅들을 뛰어넘는 ‘진리의 도약, 그 탐구’였습니다. 예수께서 스승으로서 우리들에게 권면하시는 삶이란 한 마디로 예수 이후의 후생(後生)들이 예수보다 더 큰 이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예수보다 더 큰 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