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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경건 (약 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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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경건 (약 1:22-27) 
 
 
오늘은 말씀을 행하는 문제와 참된 경건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말하고 받는 문제를 언급한 후에 곧바로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22a)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말씀 듣는 일의 중요성은 이미 언급했는데, 좀 더 알아야 할 일은 말씀 듣는 일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즐기기 위한 용도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4-25)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듣고 행해질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는 것을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이라 지적합니다(22b). 좋은 말씀을 듣다보면 성숙해지는 것 같이 생각되는데, 이것이 착각이요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 말씀은 성숙하게 하기는커녕 교만하게 만듭니다(고전 8:1). 예수님께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헛수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실천하려는 의지 없이 말씀 듣는 일 자체만을 즐긴다면 그는 성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자신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종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종이 주인님의 말씀을 듣고 즐기고만 있다면, 주인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요 주인께 반역적인 태도를 취한 셈이지요. 늘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이야기꾼 종을 고용한 주인처럼, 주종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는 사람의 또 다른 측면을 묘사합니다.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 이 구절에서 두 번 사용된 “보고”(카타노에오)라는 단어는 몰두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꼼꼼하게 살펴보고 깊이 생각해서 분명하게 깨달고 인식했다는 의미이지요. 아마도 그 시대에는 청동거울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봐야만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말씀을 듣는 자세에 비유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경청의 태도입니다. 문제점은 그렇게 듣고서는 “곧 잊어버리”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황당하고 어의가 없는 상황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합니다. 쉽게 망각하는 것은 꼭 실천으로 옮겨야겠다는 의식 없이 듣기 때문에 생깁니다. ‘행하는 일’까지 염두에 두고 듣지 않으면, 즉 듣는 일을 전부로 삼으면, 나무랄 데 없는 자세로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예배 끝나는 즉시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말씀 듣기를 속히 해도 말씀 까먹는 것조차 신속하게 되지요. 수많은 광고가 난무하는 시대는 들을 때는 혹해서 듣지만 즉시 잊어버리는 태도가 삶 중에 연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조차 이런 태도가 연단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25절을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 나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천함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성도는 말씀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 산다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 지켜 행하면” 여러 모양으로 복을 받을 것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여러 모양으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신 28:1, 15).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복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에게 약속되었습니다.

야고보의 비유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히브리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히 4:12)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은 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죄 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말씀에 비춰진 잘못된 모습을 고쳐나가는 과정이 꼭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제 “경건”의 문제를 다룹니다. ‘행함과 경건’은 야고보서 1장의 주제이자 나머지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먼저 야고보는 헛된 경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야고보가 예로 들은 사람은 적어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판단할 만큼 종교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즘 많은 종교들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자면 소위 영성이 있는 사람이지요. 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고 문제 삼는 점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는 문제입니다.

말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과묵한 성향의 사람들이 유리할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조건 침묵이 좋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잠언서에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b),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잠 25:11)라고 했습니다. 때에 맞는 말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 백성다움을 드러내는데 매우 긍정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 무조건 입 다물고 지내는 것이 최고라 가르치지 않고 때에 맞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여기서도 ‘침묵 하라’고 명하지 않고 “재갈을 먹이라”고 명합니다. 말함에 있어서 강한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야고보는 자기 혀를 절제하지 않는 사람도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하며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으로 평가합니다.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만 말의 절제가 없는 종교성이 하나님 앞에 공허함을 말합니다. 성도의 말이 무엇으로 절제되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절제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에서 벗어난 말들은 비록 뛰어난 종교성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될지라도, 소위 뛰어난 영성이라 생각될 지라도 무익하다는 평가입니다.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기에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르침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들의 가르침들은 대단히 종교성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제하지 않았기에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6-9)라고 지적하셨지요. 그 시대 대중들의 평가가 아무리 좋았을지라도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헛된 경건을 가진 위선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바르다고 인정하는 경건이란 어떤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27a)입니다. 오직 남성에게만 경제활동이 허락되었었던 구약 시대에 ‘고아와 과부’는 오직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야고보는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돌아볼 책임을 교회에 부과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세속을 등지고 자신의 인격만을 연마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경건은 세속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 중에 기본생활조차 유지할 수 없는 계층을 적극적으로 돌아보는 것이지요.

시편에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의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그들에 대해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계심을 표현했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교회와 교회의 지체들은 삶의 현장에서 이와 같은 긍휼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인정하며,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비정한 태도는 경건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세상은 일등에 관심을 가지며 일등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교회는 꼴찌를 보듬어 주며 약자를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약한 자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의 두 번째는,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27b)이라고 했습니다. 세속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되 세상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태도지요. 참으로 경건한 자는 세상이 멋지다고 하고, 세상이 박수쳐주고,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들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든 하지 안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지요. 우리 시대에 아주 경건해보이지만 실상은 참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이 하나 있습니다. 충성되게 신앙생활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가치관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널리 퍼져 교묘한 세속화 현상이 한국 교회를 점령해가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듣고 깨달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듣는 것 다르고 실천하는 것 다르다면 스스로 속이는 위선적인 신앙인일 뿐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잘 살펴보고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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