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마 5:10-12)

첨부 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마 5:10-12)


어느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 있었는데 몹시도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한 집이라 육체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게 되었고, 또 믿지 않는 시댁이라 시집와서부터 신앙때문에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거기다가 남편도 집사님의 신앙생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갈수록 핍박을 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꿋꿋이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집사님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자신이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면서 가고 있었대요.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 너무 힘이 들어요. 이 십자가는 제게 너무 커요. 조금만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부탁했고 주님은 그 때마다 웃으시며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한참을 가니까 눈앞에 요단강이 나타났습니다. 그 요단강 건너편을 보니까 너무나 아름다왔습니다. “야, 정말 좋다. 저기가 천국이구나 저기로 건너갔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오는 사람들이 커다란 십자가를 끌고 와서는 강 저편에 걸치고는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요단강 건너편, 천국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자기 십자가를 보니 이미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아졌습니다. 집사님은 너무나 서러워서 강가에 주저앉아 울다가 꿈에서 깨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 고난은 필수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 말씀, 팔복의 말씀 중 마지막 8번째 말씀입니다. 

제가 5년 전인 2006년 3월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당시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함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때에,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팔복산에 올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 않으셨던 바로 그 자리, 팔복의 말씀을 하신 그 역사적인 현장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 언덕은 바로 갈릴리 호수 옆의 언덕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때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말씀하셨습니다(눅5장). 배를 띄워서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또 어떤 때는 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현장에 가보니 그 당시가 연상이 됩니다. 호숫가에서 말씀하신 것은 하루 중 아침 시간이었을 것이고, 산에 올라가셔서 말씀하신 것은 오후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후 시간에 언덕위에 사람들을 앉혀놓고 호수쪽에서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시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팔복산에 올라가니 작은 예배당인 팔복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가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배당의 울림이 좋아서 찬송을 부르면 참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 

화음을 맞추어서 찬송을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제가 기도했는데,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역사적 현장에서 팔복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은 믿는 자의 참된 모습과 그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 중, 마지막 축복에 대해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를 적당히 믿고 살아가려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참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박해와 고난 받는 것이 왜 축복이겠습니까? 손해보고 억울함 당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이고 참된 크리스챤의 모습과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4:29)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롬8:17~18)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시해온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여기서 모두 용해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성품, 애통하는 성품, 온유한 성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 긍휼히 여기는 성품, 마음이 청결한 성품, 그리고 화평케 하는 성품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모습입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이 성회수요일이고, 그날부터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상은 곧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고난이 결코 저주이거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며 구원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고 세상이 기뻐하는 존재라면 세상과 우리가 하나라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박해’는 예수를 올바로 믿고자 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손해와 고난인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경리과에 근무하는 한 크리스챤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동료들이 점심을 사 먹으면서 늘 회사 공금으로 지불하고 거짓 영수증을 첨부하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신앙 양심상 허락지 않아 나름대로 기도한 후 조심스럽게 시정을 건의했다가 오히려 동료들에게 소외당하고 급기야는 모함을 받고 해고를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같은 크리스챤 동료들이 더욱 앞장서서 ‘너만 크리스챤이냐? 대충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는데 왜 너만 유별나게 그러느냐’며 고통을 준 일이었다고 합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런데 이때 아주 조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이 정말 정당한 핍박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박해와 핍박 중에 의를 위해, 또는 주를 위해 받는 박해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자신이 지혜롭지 못해서 받는 욕이라면 박해가 아닙니다. 
특히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자신이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으면서 박해받는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2) 자신의 허물과 잘못된 성격, 실수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못되고,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못해서 왕따를 당하거나 고난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불필요한 고집, 제한된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인한 통찰력의 부족,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만 옳다고 하는 교만까지 겹쳐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데 본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하며 마치 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3) 특정 인물, 단체, 정당을 반대하거나 또는 지지하다가 받는 박해도 아닙니다. 

4) 광신적인 종교적 열정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 중, 자기 혼자만의 지나친 열정 때문에 가족들과 가정을 소홀히 함으로 핍박을 받는 경우입니다. 

5) 자신의 철학, 신념, 이데올로기 때문에 받는 고난도 아닙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곧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 운동에 참여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에서 박해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11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로 인하여 바로 살고, 진실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충성되게 살다가 욕먹고 고난 받는 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자신은 군대에 있을 때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믿게 된 동기는 한 졸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참일 때 새로이 그리스도인 신병 한명이 전입해 왔는데, 자신은 그 사병을 아주 심하게 다루었다고 합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야간 보초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는데 그 졸병이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아무 이유 없이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군화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그런데 그 졸병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군화가 깨끗하게 닦여져서 침상 밑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이 예수를 믿기로 작심한 날이 되었고, 결국 목사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12:14에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사병이야 말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러한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에 대한 박해의 완벽한 예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으므로, 우리가 그의 의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이 납니다. 제 일복,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고, 
마지막 팔복은 (10절)“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현실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즉 지금부터 시작되어 계속해서 자라며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완전하여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셨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도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인격적인 모독과 육체적인 학대와 세상적인 음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사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이요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십 수 년 전, 교회 청소년들을 데리고 미국 연수를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 갔을 때, 네바다 주에 있는 후버 댐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또 한 번 가 보았는데, 이 댐은 미국의 건축 사상 획기적인 사건을 불리운 대공사였습니다.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굉장히 깊은 골짜기에 댐을 막아 미드호로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생겨났고, 남캘리포니아 일대에 전력을 공급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거친 사막에 라스베가스라는 세계적인 오락 도시가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이 댐 입구에 세워진 게시판에는 인상 깊은 글이 있습니다. 댐 건설 공사 중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곳에서 희생당한 이유는 사막에 장미꽃을 피우고, 골짜기에 생명의 강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성지순례갔을 때,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보았습니다. 지금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좁은 시장골목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던 그 언덕위에는 여러 개의 교회들이 세워져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잠시 미국의 후버댐에 세워져 있던 게시판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이곳에서 생명을 희생하신 이유는 허다한 인생의 사막에 다시 장미꽃을 피우고, 사망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인생의 사막에 장미꽃을 피우고,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을 흘러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오래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한 현재의 위치에서 천년만년 있을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두 다 두고 떠나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찬송 490장) 2절,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여러분, 천국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실패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물질과 시간과 세상적인 것에 노예가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천국을 살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들로, 예수님을 위해 이 땅에서 순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특권이요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