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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등불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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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마 5:13-16)  

 
2,000년 7월 말부터 한 달간 한국 언론 재단이라는 단체에서 전국의 18세 이상 65세 미만의 사람들 1,200명에게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영향력 있는 집단은 누구입니까?’
1등은 당연히 정치인들로 56.1%를 차지했습니다.
언론인도 나오고, 교육인도 나오고, 노조도 1.4%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인들은 1.3% 꼴찌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설문조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교회가, 성도가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을 가리켜 소금과 빛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소금은 눈에 띄지 않는 영향력을 주는 물질입니다.
생선에 뿌려놓은 한 줌의 소금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선의 부패를 막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에게 접촉하는 사람마다 영향력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반면 등불은 눈에 보이는 영향력을 주는 물체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확연히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성도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영향력도 있어야 합니다.

1. 소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성경과 유대문헌을 살펴보면 소금의 역할과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소금은 생명을 유지시킵니다.(외경 시락서 39:36)
소금은 물, 불, 곡식, 의복 등과 같이 삶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입니다.

②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소금은 생선과 고기를 보존하는데 사용됩니다.(바룩 1서 6:28)

③ 소금은 맛을 냅니다.

④ 소금은 치료제의 역할을 합니다.
유대문헌에 보면, 치통도 소금으로 고쳤고, 신생아도 소금으로 문질러 그 몸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⑤ 소금은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뿌렸습니다.
레2: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이와 같이 소금은 실생활에서 매우 유용한 물질이었기 때문에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깊이 공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소금에 대한 부정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13절 “........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에 주위를 기울입니다.
소금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경우는 어떤 때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소금의 짠 맛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소금에 짠 맛이 없을까요?
본래 소금은 짠 물질이 아닙니까?
소금이 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의 역할은 녹음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다이아몬드 같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소금같이 되라고 하신 이유는 ‘녹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보석처럼 귀하게 대접받으려고 하지 말고 더러운 곳, 살맛나지 않는 곳, 썩어지는 곳에 녹아들어가 깨끗하게 만들고, 살맛을 내고,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희생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가 녹음으로 드러나듯이 성도의 가치는 희생함으로 드러납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닌가요?
요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 이제 빛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빛은 자기 존재를 주위 것들과 구별시킵니다.
‘내가 여기 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든지 빛을 알아봅니다.
빛 자체가 주위의 사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빛은 많은 사람의 주목거리가 됩니다.

②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 하더라도 빛이 비치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빛의 분량에 따라서 어두움을 정복하는 분량이 결정됩니다. 
빛의 분량이 적으면 주변만을 밝힙니다.
그러나 빛의 분량이 많으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③ 빛은 자기소멸에서 나옵니다.
등잔불이 계속 빛을 발하자면 기름이 타들어가야 합니다.
촛불이 계속 빛을 발하자면 초가 소멸되어야 합니다.
초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초는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서 없어지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등불에 대하여 부정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흙으로 만든 작은 접시에 기름을 담고 심지에 불을 붙인 등불이 유일한 조명기구였습니다.
그것을 희랍어로 ‘뤼크노스’라고 하는데 오늘날 밝기를 재는 단위인 럭스(lux)라는 용어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실내에서 이러한 등잔을 벽에 돌출된 등경 위에 두어 온 방안을 밝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집안에 없을 때 잠간 등잔을 말 아래에 놓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쥐나 뱀 등 동물이 등잔을 잘못 건드리면 화재가 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상시 등잔을 말 아래 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둔다는 말씀으로 강조하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등불이 놓인 자리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등불이 말 아래에 있으면 영향력이 없어집니다.
등불이 있으나마나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있어야 할 자리, 가야할 자리가 어딘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어두운 곳, 그늘진 곳에는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밝은 곳, 풍요롭고 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생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달라야 된다는 것이지요.
등불은 어두움에 필요합니다.
낮에는 등불을 끕니다.
태양이 비취기 때문입니다.
등불은 어둡고, 그늘진 곳에 있어야 합당합니다.

사 61:1절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성령이 임하시면 성도들의 발걸음은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본문을 통해 주시고자하시는 말씀은 ‘영향력’과 ‘희생’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도란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영향력은 희생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①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 새벽기도회 때 젊은이들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18세기 영국 정치인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5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소금과 빛 된 삶을 살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국에 잡혀온 아프리카 노예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27살 때 노예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국가재정 수입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노예문제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폐지 운동을 벌이자 당시 영국의 거물급 정치인인 에빙턴 백작은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것은 사적인 감정이다. 인간의 존엄이라고 하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정치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반대와 암살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노예해방을 위해 헌신한 지 56년 만에 영국의회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크리스쳔 정치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것이 대세라고, 시대의 흐름이라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시대의 대세는 바알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세에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그 시대의 소금이며 빛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시대에 영향을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를 지혜로운 왕으로 칭송합니다.
집권초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는 우상을 숭배하여 나라를 분열시킨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왕상11:3절에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성경은 솔로몬이 천 명의 부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세상 것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직장에, 모임에, 이웃에 영향력을 미칩니까? 아니면 받습니까?
세상에 영향력을 가진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② 성도의 영향력은 희생에서 옵니다. 

구정 연휴 기간이었던 지난 2월 4일 KBS TV에서 구정 특선 영화로 ‘울지마 톤즈’가 방영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기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영화 속에서 저의 지난 선교사역이 오버랩 되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절망의 땅 남부 수단에서, 그 중에서도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그늘 아래 버려진 땅 톤즈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다 지난해 이맘때쯤 48살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은 성직자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의과 대학을 나와 의사가 된 후에 다시 캐톨릭 성직자가 되는 신부수업을 받은 후에 수단의 톤즈에 선교사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삶을 선택한 동기는 마 25:40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는 의사요 신부요 교사였으며 그리고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톤즈 땅의 버려진 아이들 한명 한명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러다 암으로 쓰러졌습니다.
톤즈의 어린이들이 이태석 신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면서 서투른 한국말로 흐느끼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그들에게 가르쳐준 노래였습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저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땅에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그는 이 땅의 소금이고, 빛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희생이 감동을 줍니다.
영향력은 희생으로부터 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작은 희생을 감당하는 교우들이 있어 저의 목회는 행복합니다.

나가는 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1년 세계 투명성 본부에서 발표한 국가별 부패지수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91개나라 중에서 42위입니다.
부패가 심각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어떤 외국인은 우리나라를 ‘ROTC'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ROTC'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Republic Of Total Corruption, 총체적 부패 공화국이라는 뜻입니다.
교인들이 25%가 된다는 나라가 이런 오명을 얻어서야 되겠습니까?

소금의 맛과 등불의 빛이 바로 성도들의 능력입니다.
성도들의 능력이란 교회의 크기, 교인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있습니다.
영향력이 크면 아무리 작은 교회일지라도 능력이 있는 교회이고, 영향력이 적으면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능력이 없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변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 교우들은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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