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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의 목적 (벧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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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목적 (벧전 1:1-2)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가만히 집에 앉아서도 온 세상의 풍물을 다 구경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이런 세상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기껏 있다고 해야 라디오뿐인 세상 전화기조차도 동네에 한두 대 있을까 말까 한 세상을 우리네가 살았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세상 아니 쌀조차도 자급이 되지를 않던 세상이어서 흰 쌀밥 한번 원 없이 먹어봤으면 좋겠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 시작이 되고 구로공단이 생기면서 농촌에서만 살던 사람들이 서울로 도시로 모여들기를 시작하던 때가 불과 50년 전입니다. 그전까지는 고향을 떠나 산다고 하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그런 때였습니다. 이제는 고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의 고향은 있지만 고향에서 산 날보다는 고향을 떠나서 산 날들이 더 오래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제는 세계화 물결을 타고 세계 방방곡곡 우리네 사람들이 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제는 거꾸로 새로운 삶을 찾아 우리 땅을 찾은 이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다 나그네입니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은 거의 생각도 하지 않는 나그네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땅 하란을 떠나 갈대아 우르에 정착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찌됐든 그는 갈대아 우르를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던 중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하심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까지 와서 정착을 합니다. 그리고 아내 사라가 죽은 다음 에브론의 밭을 사서 집안의 무덤을 삼음으로 드디어 그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손자 야곱으로 하여금 다시금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분명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었고 7년 대가뭄이라는 어려움 속에 요셉의 초청으로 내려가는 길이었기는 하나 저가 가나안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계획아래 이루어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의 바로 앞에 서서 바로를 축복하며 하는 말이 “내가 지금까지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였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 모두는 다 나그네로서의 인생길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밖에는 떼까마귀들로 아주 장관을 이룹니다.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 떼까마귀들은 철새들로서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를 찾았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녘으로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정착해 사는 토종 까마귀와는 조금 구별됩니다. 심지어 이들은 얼마나 용맹스러운지 거대한 독수리들을 오히려 무리지어 공격할 정도입니다. 이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여름 철새들이 찾아와 머물게 될 것입니다. 

전 1:2~4에 이르기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했고 전 1:9~11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국은 잘 났네 못 났네 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떠나갔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며칠 전 3.1절을 지났는데 초등학생들에게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누군가는 유관순 누나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안중근 의사가 다친 사람을 치료해 준 날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지 않습니다. 

국사 과목을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야 비로소 배웁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하지만 그것뿐입니까? 우리네 기억에서 앞서간 어른들에 대한 기억조차도 벌써 가물가물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이 무얼 말합니까? 야곱의 고백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향을 떠나 본도와 갈리다아, 갑바도기아와 아시아 그리고 비드니아와 같은 곳으로 흩어져 있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단지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그 당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나그네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원래 고향이 아니어서 나그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서 살고 있든 우리 모두는 다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단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에 불과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더디기만 한 것 같던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빨리 지나갑니다. 정말 쏜살같습니다. 

이 빠른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고향 우리가 돌아갈 곳 하나님 나라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 아무리 가고 싶은 고향이라도 갈 수가 없습니다. 왜 가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준비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말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자기들만 하나님 나라 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든다고요. 하지만 그것만은 결코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행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요 3:16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오직 방법은 한 가지 예수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누구를 믿든 그건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오늘을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자녀로 부르시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만들어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하나님 나라 왕자로서의 권능과 권세도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지 말고 하루를 살아도 당당하게 사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또한 그렇게 주실 줄로 믿고 당당하게 간구하십시오. 아프다고만 하지 말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고쳐달라고 하세요.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을 산다고 해서 눈치꾸러기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나그네일망정 마치 애굽 왕 바로를 축복하는 야곱처럼 우리들에게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권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 축복권을 가지고 당당하게 축복하십시오. 누구 때문에 망하게 됐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복의 통로를 삼으셔서 내가 먼저 복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그들이 복을 받기에 합당치 않으면 그 복을 내게로 돌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래도 복 받고 저래도 복 받는 비결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권능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주세요. 미우면 미울수록 더 복을 비세요. 그러면 미운 사람하고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욕하거든 그럴수록 더 그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누가 나를 힘들게 하거든 더 웃는 얼굴로 대하세요. 사실은 그 사람이 나를 욕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그만큼 부러운 겁니다. 왜요? 너무 행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정말 미울 겁니다. 왜요? 금방 망할 것 같은데 안 망하거든요. 자기들이 볼 때는 다 죽어가는 것 같은데 다시 일어나거든요. 그게 요셉의 인생이었습니다. 그게 모세의 인생이었고 다윗의 인생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살더라도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아들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택하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면서 비록 여러 곳으로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당신들은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택하신 이유를 여기서 이야기해줍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버지가 미리 아셨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어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런 나를 하나님이 먼저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택해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개는요 아무리 똑똑해도 멍멍 할 뿐입니다. 물론 으르렁거릴 때도 있고 낑낑할 때도 있지만 그게 개가 하는 말 전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야 개이기 때문입니다. 

앵무새가 말을 한다고 해도 그건 몇 마디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죠. 우리처럼 자유롭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다 똑같습니다. 다 죽은 목숨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다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면해주시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죄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한테 뿌려지면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어집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따로 구별하시는데 어떻게 구별하시느냐 하면 순종함으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시고 부르신 그 부름에 네 하고 따르게끔 성령이 이끌어주십니다. 갈 4:6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서 그냥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 피가 우리에게 뿌려지게 되고 그 순간 우리는 모든 죄가 씻김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갈 2:20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임을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주님이시라고 믿기만 하면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듯 우리를 미리 아시고 택하셔서 자녀 되게 하시는 것은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요 하늘나라에 속한 모든 것을 이제 우리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내가 잘 나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미리 아시고 택해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깨닫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깨닫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에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려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못된 놈이었다고 해도 왕이 나를 아들 삼아주셨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왕자입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왕자 노릇을 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거야 당연히 왕자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면 또한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마 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누구에게 있어요?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세상 끝날 까지 누구와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까?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럼 너희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여기 말씀하시는 너희인 줄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고 그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으니 당연히 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우리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행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겠죠? 보세요 막 16:16~18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고 말씀합니다. 막 6:4에서도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라고 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속지 마세요. 

우리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비난하게 하고 문제점을 지적해내게 하는 악한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오히려 요한복음 21장의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셔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물질하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던 그 예수님처럼 그렇게 손을 잡아 주세요. 그리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신 그 말씀처럼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십시오. 수고하는 사람이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더욱 격려하시고 아 수고한다고 아 참 잘 한다고 그렇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더 건네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시고 택하신 그 목적대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기를 바란다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에 관해서는 우리는 계속 목이 말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순종입니다. 신명기에서 왜 그토록 순종을 강조했는가 하면 믿으면 순종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과 순종은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단지 믿기만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항상 감사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은 더욱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은혜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우리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이요 또한 평강은 모든 어그러진 것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평강이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 같은 게 무슨 자격으로 축복하냐고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격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나를 아시고 택하실 때 나의 형편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세울만한 뭐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택하셨습니다. 나는 감사함으로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자녀라 하시면서 네가 하늘나라 왕자가 되었으니 하늘나라 공주가 되었으니 그 자격으로 축복하라 하십니다. 

오직 나는 믿음으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복하였더니 내게 더 큰 은혜가 있고 평강이 넘치더란 말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투덜대지 마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고백하십시오.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용광로 속에 집어넣겠다고 하는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흔들리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항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항상 우리들의 삶 속에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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