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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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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욘 4:1-11) 
 
 
편협한 인간의 마음은 은혜를 받아도 쉽게 바꾸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는 장면을 보면서 선지자 요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요나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신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통하여 실물 교훈을 하셨습니다. 요나가 박넝쿨의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벌레에게 명하여 박넝쿨을 씹게 하였습니다. 

박넝쿨의 그늘이 사라져버리자 요나는 죽고 싶도록 분을 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고 거칠게 대답하였습니다. 자기가 심은 것도 아니고 거름을 주어 키운 것도 아니고 그냥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 죽는 박넝쿨일 뿐인데 거기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맞는 말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 사물의 이치를 망각한 처사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선지자가 한 개의 박넝쿨에다 명줄을 걸고 그것 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성을 내었습니다. 풀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지기도 합니다(사 40:7). 잠시 자라다가 시들어버리는 한 포기 식물 때문에 죽겠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1) 풀은 났다가 시들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전 3:1-2). 나고, 죽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이른 봄에 땅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거나 말라져 죽습니다. 박녕쿨도 일년생 식물로서 무성하게 자라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박 열매를 맺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쉽게 말라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해 준 박넝쿨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잎을 피었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말라 죽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작은 식물 하나라도 다 하나님의 간섭에 따라 생성변화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에나 요구에 따라서 살고, 죽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사람의 생명도 끝날이 있습니다.

요나는 한낱 식물의 나고, 죽는 것이 자기의 기분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을 내었는데 그보다 더한 사람의 목숨도 제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천하의 범사가 때가 있고 기한이 있다는 말씀 중에는 사람도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일러 주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한 이후 자연법에 의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피하려 하거나 거부하려고만 합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기나 가족에게 오는 죽음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3) 인류의 역사도 종말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 권력과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보게 됩니다. 고대에서부터 중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나라와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시대마다 세계사를 수놓았던 찬란한 문명과 그 화려했던 영화도 다 풀의 꽃처럼 시들고 말았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봉건왕조와 절대 군주들이 세세무궁토록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은 비참한 종말을 고했습니다. 요즘도 지구촌 곳곳에서 수십 년씩 독재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민주화의 바람 앞에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역사의 순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사코 이를 거부하려 합니다. 박넝쿨이 마르는 것을 못 받아들이는 요나의 심정도 그런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요나가 처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려 했던 것이나 니느웨성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성을 낸 것도 하나님의 의중을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못마땅하였습니다.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었다고 했습니다. 2절에 요나의 기도는 그가 전에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던 기도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 너무나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줄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간 것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중심의 생각을 했고 자기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였습니다(겔 33:11). 

2) 자기에게만 가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가 두 번째 성을 낸 것은 자기에게 그늘을 지어 주던 박넝쿨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든 일입니다. 처음 박넝쿨이 햇볕을 가려줄 때 요나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레가 줄기를 갉아먹어 박넝쿨이 시들어 버리자 그는 버럭 성을 내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까짓 박넝쿨 하나 마른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성을 내느냐고 하였지만 요나는 성을 내다가 죽더라도 자기가 옳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제게 못마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자기는 어떤 경우에도 복을 받아야 된다는 매우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제게 유익하면 복이고, 그렇지 못하면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3) 자기의 분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분수에 넘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바로 아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스올의 뱃속에서 있을 때는 무조건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욘 2:9). 그때는 자기를 살려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때는 반발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요나를 스올에서 구해 주신 것이나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살려 주시는 것도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3. 자기의 사명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확고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 가치관을 근거로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될 대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롬 14:7-8). 적어도 박넝쿨 하나를 자기 마음대로 못해서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성도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좇아 개혁교회 성도들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에다 자기의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자이며 거기에다 목숨 거는 자입니다(삼상 17:26). 중세기 교회가 교황의 권세를 앞세워 세상적인 영광을 석권할 때 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슬로건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2) 주와 복음을 위하는 일

성경은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6). 그 귀한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막 8:36).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는 그 소중한 목숨을 걸어야 되는 요긴한 가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8:35에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감옥에 가는 것과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눅 22:33).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행 20:24).

3) 영원한 기업을 위하는 일

예수님의 천국비유 가운데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4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의 이상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비중을 둡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목적을 따라 살면서 땅에 있는 것에다 명줄을 걸지만 우리에게는 하늘의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그곳의 기업을 소망합니다(빌 3:18-21).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였습니다(눅 12:20).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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