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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쁘게 하고, 기쁨을 얻고 (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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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하고, 기쁨을 얻고 (롬 15:1-7)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직 유교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유교 문화 는 한 마디로 <꾸밈의 문화>입니다. 말과 현실이 차이가 많습니다. 시험을 잘 친 학생도 <망쳤다>고 연막을 피웁니다. 음식을 많이 차린 사람도 <차린 게 없어 미 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경향은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당 입구에 서서 <본 인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 보십시오. 모두가 하나같이 <저는 믿음이 약하고 부족해서....>라고 말꼬리를 흐릴 것이고, 우리는 그 대답을 당연하 게 여깁니다. 만약 어떤 분이 <예, 저는 믿음이 좋습니다. 아주 믿음이 강합니 다.>라고 대답하면 오히려 그 사람을 교만한 사람으로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우리는 조금 당황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 앞부분을 보면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색하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정말 바울은 모든 면에 서 강했습니까? 그에게는 약점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도 여러 면 에서 매우 약했습니다. 
우선 그는 입지가 불안정했습니다. 비록 사방으로 다니면서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과거에 핍박자였 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를 비방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평가 절하했습니다. 핍 박자였다는 사실은 평생 족쇄가 되었습니다. 

또 바울은 경제적으로도 약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사역자들의 생활을 책 임지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스스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 다. 빌립보교회처럼 일부 교회와 성도들이 그를 후원했지만, 늘 부족했습니다. 그 는 바쁜 와중에도 돈을 벌기 위해 천막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약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가시가 눈병, 혹은 간 질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그는 육체적으로도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런 강 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강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오 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고, 그 능력 때문에 자신이 강해진다고 고백했습니 다.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 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 한 그 때에 강함이라> 결국 바울은 실제로는 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 하나만큼은 강한 분이 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의 고백을 가지길 원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매우 약합니다. 육체도, 경제적 환경도, 인간관계도, 정신적인 의지도 약합니다. 그러나 믿음만은 강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해질 수 있음을 믿 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안에서 강하다!> 이게 바로 성도의 거룩한 자존감입 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어려울 때 도우시니, 날마다 가 까이 걷겠네. 나를 허락하시어 주 가까이 하도록, 날마다 더 가까이, 주님께 나가기 원하네.....> 할렐루야!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당당히 사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사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한 사람의 연약함 을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1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의 사명은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강자와 약자가 다 있습니다. 약자는 강자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와 같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는 약자는 강자의 먹이입니다. 강자는 약자를 무자비하게 먹어치웁니다. 강자가 약자를 봐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아 주 는 데서 사람다움이 나타납니다. 더욱이 성도들은 강자가 약자를 돌보아야 합니 다. 여기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누가 약자일까요? 가난한 사람, 병약한 사람, 배움의 기회가 없어 배우지 못한 이들, 억압 속에 있는 이들도 약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만 약자인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아도, 몸이 건강해도. 많이 배웠어도, 신분이 높아도 약자일수있습니다.아무리좋은환경에있어도사단의권세에눌려있 는 사람은 다 약자입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모 르는 이들은 다 약자입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믿음을 버리고 떠날 사람들은 다 약자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이러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이 일을잘 하게되길 기원합니다. 그게 우리 사명 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약점을 담당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약자의 약점을 담 당하려면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 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 이게 참 어 렵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빵한 조각이있다고합시다. 그빵하나는 한사람먹 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런데사람은 두명입니다. 그 중한 명은 어린이고, 한명은 어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힘센 어른이 어린이를 윽박지르면서 빵을 혼자 다 먹어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에게 빵을 주어야 할까요? 강자가 약자의 약함을 담당해 주는 원리대로 하려면 어른은 배고파도 참고, 아이에게 빵을 주어 야 합니다. 이게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다면 그건 최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기 쁜것>과<남이 기쁜것>중 하나를선택해야 할때가있다는 것입니다.이때 강한 자는약한자를위해 자신을기쁘게하는 것을포기해야합니다.남을기쁘 게 하려면 자신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남을 웃게 하려면 자신은 울어야 할 때 가 많습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려면 자신의 씀씀이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게 정 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자를 돌보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가 굳이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원합니다. 아마도 이것을 부정하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은 언제 기뻐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남을 기쁘게 할 때 함께 기뻐하십니다. 연약한사람을위해우리자신을기쁘게하기를포기할 때, 그일은 남을기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이런 힘든 일을 요구하십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강한 것으로 따진다면 예수님보다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 의 창조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신적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전능자 입니다. 

그런데 그 강자이신 예수님께서 약자인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당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 이 고통의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 리의 죄의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였 지만,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 은 본문 1절의 말씀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주님께서 우리가 약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길 원하십 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다해 약자들의 연약함을 돌볼 수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셨습니다. 물질, 건강, 지위, 갖가지 능력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주셨나요? 다름 아닌 약자들의 연약함을 담당 하는데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사 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께서 배가 고플 것을 알고 교묘하게 유혹했습니다. <이 돌 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면서 그 시 험을 이기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또 십자가를 지시기 몇 일 전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장기를 면하시려고 아직 무화과가 제대 로 익을 철도 아닌데, 설익은 무화과라도 얻으시려고 잎사귀 사이를 뒤지셨습니 다. 왜 이런 마음아픈 모습을 보이십니까? 당신의 능력으로 돌로 떡을 만들고, 음식이 되게 해서 잡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신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 것은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마음껏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 능력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당신의 강한 능력을 남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강한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사용하는 원리입니다. <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남을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강함으로 약한 이를 돕지않고오히려 힘들게 하면 그것 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권력으로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죄 입니다. 가진 지식으로 못 배운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입니다. 물질의 힘으로 가난한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들 을 동원하여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강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믿음 이 강한 성도들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재정도 풍성하고, 시설도 확충되고, 여러 면으로 다갖춘교회가 되길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주신 그모든강점들 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길 원합니다. 어려운 선교현장을 돕 고, 어려운 교회를 돕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 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 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 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은 성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우리 교회도 연약한 이 들을 기쁨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길 원하네....>란 찬양의 가사처럼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바로 그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멋진 성도들, 강해 보이는 그 사람들도 연약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 도 약점이있습니다. 다른이의 눈물을 닦아주는사람도 남몰래 눈물을흘릴때 가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해주는 의사도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그는 어디서위로받을수 있겠습니까? 남을기쁘게하려고 애쓰는그 사람은어디서 기쁨을 얻겠습니까? 

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4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아멘. 

여기 두 가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힘들어 도 참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강자들이 어려움을 만날 때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가정에엄마와 어린 아들이 있다고해 보세요. 엄마는어 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어서 아이를 뒷바라지합니다. 그러나 엄마도 지칠 때가 있고, 위로 가 필요합니다. 그 때 엄마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습니까? 아이에게 기댈까요? 소 용없습니다. 아이는 자기 앞가림도 못합니다. 이 때 엄마가 기댈 곳은 주님의 품 뿐입니다.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 품에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이 주님의말씀을 통해위로와 기쁨을 얻는 것>은 바울 사도 자신이 늘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매우 힘 들었습니다. 그 전에 아테네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논쟁을 했는데, 복음의 본질을 더 강력하게 선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큰 성 과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고린도에 온 바울은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 가 거대 도시 고린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비록바 울이 강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도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이 때 어떻게 되 었나요? 이 때 그는 주님을 통해 기쁨을 얻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1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 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 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 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 니라>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바울을 해할 수 없을 것이며, 고린도에도 하나 님의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 을 통해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얻는 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마친 후에 늘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겟세마네 에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주님만의 마음의 짐을 기도로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다가 우리자신이 지칠 때, 우리에게도 기쁨이 필요할 때, 그 때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통 해 위로를 얻으십시오. 많은 목회자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이유는 새벽마다 주님을 통해 얻는 위로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복음을 위해 사는 분들이 사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주님 품에서 얻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 려하시며,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얼굴에 웃음이 번져납니다. 이런 은 혜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을 통해 얻는 기쁨을다 합쳐도주님을 통해서얻는위로와기쁨에 비할 수없습니 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 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난 강하다>, 이런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하는 이기적삶을살지 말고,예수님처럼 다른 연약한 사람 들을 기쁘게하는 삶을살아야 합니다. 그때주님은우리를보시고 기뻐하실것 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께 기쁨을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힘들고 낙심될 때, 주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품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에 비길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약한 이들에게 기 쁨을 주고, 한편으로는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를 통해 홀리 조이가 충만하게 유통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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