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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를 부르시고 구원자로 보내어 믿게 하다 (출 2:23 - 출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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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르시고 구원자로 보내어 믿게 하다 (출 2:23 - 출 4:31)
 

2011년도 교회표어를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때 담아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 복음, 복음이라고 말하며 말끝마다 복음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담아서 말해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던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강론을 통하여 옛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우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담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일정한 형식과 문답을 가진 복음전도를 해왔습니다. 사영리 전도방식과 전도폭발 전도방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담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백성들은 그렇게 기계적인 일정한 형식을 따라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부가 친구들에게 자기 신랑을 자랑하고 기뻐할 때, 사영리 방식이나 전도폭발의 일정한 문답형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단히 우스울 것입니다. 자기 기쁨으로 신랑을 자랑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어 그 내용을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또한 기쁘게 증거할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증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기본적인 내용을 숙지하면서 자유롭게 신랑되신 주님을 자랑하고 증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이러한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 임하신 하늘 나라를 나타내고 증거하여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추수할 일꾼으로 봉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까지 몇 주에 걸쳐 출애굽기를 강론했습니다. 먼저 야곱 후손의 나라의 시작이라고 처음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세기의 언약을 성취한 새 경륜의 시작이 야곱 후손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출애굽기의 전체적인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새 일에 히브리 산파들이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하여 새 시대를 여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출애굽기의 새 일은 레위 지파의 아들이요 물에서 건져낸 모세를 지도자로 애굽에서 나오는 구원의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지팡이와 이적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믿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였다고 오늘 본문에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출애굽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무언가 떨어지듯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즉 출애굽의 구원은 역사와 시대, 그리고 언약을 말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의 새 구원의 일을 언약의 성취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개인이 산이나 집회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구원의 체험을 함으로 구원받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내 인생에 찾아 오셔서 나를 흔들고 나를 새롭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했다고 말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항상 언약의 역사적인 성취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시간에 왜 출애굽기 2:22절까지 설교본문으로 끊고, 오늘 23절부터 강론해야 하는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2:23절의 ‘애굽 왕은 죽었고’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는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과 강하여짐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압제하였습니다. 바로 이 왕이 죽었던 일을 말함으로 출애굽기는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죽음으로 이제 새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났던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입니다. 비록 군사정권을 끝내지는 못했지만 10.26 사건 이후로 민주화 바람이 크게 불었던 것을 생각하시면, 오늘 본문에서 ‘애굽 왕이 죽었고’라는 표현을 이해할 것입니다. 애굽 왕이 죽으므로 새 변화의 기운이 일어났고 출애굽의 새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애굽 왕이 죽었다는 말은 쉽게 지나칠 말이 아닙니다. 
  
애굽 왕이 죽으므로 시작되는 출애굽의 일은 또한 역사적인 성취라고 말씀합니다. 2:24-25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즉 오늘 출애굽기 2:23-25절은 애굽 왕이 죽은 것,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신 것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여 출애굽의 새 일이 이루어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출애굽의 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에 대하여 서론적인 이야기를 2:23-25절에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서론적인 이야기는 사실 어떤 역대 정권에서나 다 같이 말해왔던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설 때마다 새 대통령은 그의 정권이 어떤 역사적 성취를 이루는 나라인가를 항상 말합니다. 민주화 정권 같으면 4.19민주화혁명을 성취하는 역사적 소명이 있는 나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 왕이 죽고 이스라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는 출애굽의 구원을 위하여 모세를 지도자로 불렀다고 출애굽기 3장은 말하는 것입니다. 3:1-5절은 시내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의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심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3:6-10절은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이 애굽인의 손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에 모세를 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도 역시 현대사를 다시 되돌아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통하여 그 당시 군사정권을 끝내지 못하고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을 낳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3김, 즉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중 어느 누구도 국민으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역사적 사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자기들 욕심만 생각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군사정권이 계속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내용은 이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는 구원의 지도자로 모세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여 출애굽으로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모세를 불렀고 그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보냄에 대하여 모세는 자기가 누구이기에 애굽 바로 왕에게 가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리이까 라고 하며 자기를 보내는 자가 누구라고 백성에게 말할 것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13-22절은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인가 알려주고,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임을 말합니다. 
  
그럼 모세를 보내는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3:14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 문장은 참으로 난해합니다.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영어로 이를 말한다면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be동사’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게 여호와, 곧 야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이의 이름을 그냥 ‘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만약 제 자식이 저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니 아버지야!’라는 대답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자식 앞에 돈이 많다거나 가문이 어떻다거나 어느 학교를 나왔다거나 그런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be동사’ 하셨던 하나님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셨고, 이삭에게 함께 하셨으며, 야곱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곧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애굽에서 당한 일을 돌아보시고 애굽의 고난 중에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게 하셨다고 증거하라고 여호와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여호와는 애굽을 강한 손으로 심판하시고 애굽에서 나갈 때에 여인들이 애굽 사람의 금과 은의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여 나온다는 말은 애굽을 항복케 하고 승리하여 전리품을 받아 가지고 나올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어떤 일로 부르셨는가를 말하고, 모세를 보내신 분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을 주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되, 강한 손으로 애굽을 심판하고 전리품을 받아 가지고 나올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게 3장의 내용입니다.
  
그럼 과연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일을 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점에서 또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5.18때 3김 중 어느 누구도 확실한 믿음을 국민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민주화의 나라를 새롭게 열어가는 지도자로 확실한 우위를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차지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결국 서로 싸움을 벌이다가, 도리어 전두환에게 정권을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군사정권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새 시대의 나라을 이끄는 영도자라면 국민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기 4장도 그러한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4:1-2절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믿지 못할 터이니 지팡이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팡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여러분들 암행어사가 가지고 다니는 마패를 아시지요? “암행어사 출두야!”라고 외치며 꺼내어 보이는 마패를 잘 아시잖아요! 이 마패를 꺼내어 들어 보여주면 이 사람이 임금님의 명을 받고 온 사신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었다는 말은 이와 같습니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이면 임금의 권세로 보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암행어사를 믿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기 4장은 모세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믿는 근거는 바로 지팡이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팡이를 주셨다는 것이 무슨 막대기를 흔들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서커스의 광대가 지팡이로 묘기를 부리듯이 하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이적을 나타내는 지팡이입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던지지 뱀이 되었다가 그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행합니다. 악어나 사자나 코끼리를 만들지 아니하고 왜 뱀을 만들었겠습니까? 이건 단순히 마술을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신은 뱀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팡이는 뱀을 꺾는 힘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는 이유는 애굽의 권세를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권세를 여호와로부터 위임을 받아 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로 행하는 이적을 머리로 해서 문둥병을 낫게 하는 이적, 나일 강을 피로 만드는 이적은 모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데 필요한 이적들입니다. 이 세 가지 이적을 행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적을 행하는 권세를 모세에게 주었어도 모세는 자기의 부족함을 다시 말합니다. 4:10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 앞에 가서 말을 하라고 보내려고 했는데 모세는 입이 뻣뻣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11절입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도, 말을 못하는 것도, 들을 수 있는 것도, 들을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볼 수 없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말을 못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4:12절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가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쯤 이르면 화가 날 법도 하지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노하여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을 옆에 붙여 두어 마치 대변인처럼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할 말을 아론에게 주면 아론이 말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4:17절입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렇게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무슨 일로 보내셨는가를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모세를 믿게 하는 이적의 지팡이를 주어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을 전하라고 한 것이 출애굽기 3장과 4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그런 후에 4:18절 이하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돌아와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에 있는 형제들에게 가 보아야 하겠다고 하니 장인이 허락합니다. 이 때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형제들을 구원하는 일로 광야의 미디안을 떠나려 할 때도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이제 모세가 보냄을 받아 일을 하러 떠나려 할 때 애굽 왕이 죽은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려 하는 때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앞에서 ‘애굽 왕이 죽었고’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는 일에 앞서서 ‘애굽 왕이 죽었고’라는 말을 앞에서 하고, 이제 모세가 보내심을 받아 일을 하려고 떠날 때에도 이 말을 반복하여 출애굽의 구원의 새 일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가 짐을 꾸려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지팡이를 손에 잡았습니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는 모세에게 다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가거든 이적을 바로 왕 앞에서 다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이를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다 치셔서 여호와의 장자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은 여호와의 소유가 된 백성을 구원하여 내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내용이 여기까지는 잘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4:24절 이하에 모세를 갑자기 죽이려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자기 아들의 포리를 베어 모세의 발에 갖다 대어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즉 왜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모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비상사태가 벌어진 모습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녀들도 그 일에 합당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건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의 예를 들면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자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가 낙선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 아들의 병역문제였다고 후대에서 해석합니다. 사실 억울한 일로 그리되기는 하였지만 여하튼 한국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문제였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가 자기 아들의 병역을 회피하였다고 하면 그 자질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자녀들이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고 하면 정말 문제가 크다는 말입니다. 
  
아직 모세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셈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황급히 십보라는 할례를 행하여 죽음을 모면하였습니다. 
  
이 후에 아론에게 명하여 모세를 광야에 가서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났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부르신 일과 그에게 주신 이적을 아론에게 다 알렸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아론이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여 보였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믿었습니다. 4:31절입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앞에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은 바로 왕 아래 살면서 바로에게 경배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로 말미암아 자기 소유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여호와께로 돌이켜서 그 앞에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결국 그 땅을 잃어버리고 이방 땅에 흩어짐으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에게 남은 자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돌아오는 첫 출애굽의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지만,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새 출애굽으로 이루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 나라로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세례를 받으심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이며 천사가 수종을 드는 왕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옛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잡히자 비로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애굽 왕이 죽은 후에 모세를 부르셔서 그를 보내신 것처럼 요한이 잡히자 하나님의 아들은 갈릴리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때가 찬’ 복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복음전파는 ‘때가 찼다’라는 시대적, 역사적 성취를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가짜요, 오직 하나님만 참 신이니까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구원을 이처럼 역사적 성취로 말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으로 말하자면 모세의 글과 시편에 기록한 모든 것을 이루시려고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선지자로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며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도 ‘때가 찼다’라는 말을 통해서 요한이 잡히므로 새 시대의 구원의 새 일이 예수님의 복음선포로 시작됨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찬 구원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구원, 모세와 같은 종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구원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새 시대의 새 구원이 아들로 말미암아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이스라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셔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아들의 구원은 모든 언약을 이루사 천하만민으로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구약의 나라가 종의 나라요, 땅의 나라였지만, 이제 신약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요, 하늘의 나라라고 증거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누구이며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았는지 또 믿게 하기 위하여 지팡이를 받아 이적을 행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 아들이 누구이며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았는지 또 믿게 하기 위하여 어떤 표적을 행하였는지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기 증거가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구속하사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드릴 분이십니다. 
  
창조도 아들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습니다. 창조된 세계를 상속하실 분도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은 창세 전부터 함께 하셨습니다. ‘나는 나이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천지만물을 상속하는 상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소유로부터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로 구원하여 여호와께 돌이켜 경배하는 일에 구원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소유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구원하여 오직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백성으로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증거하는 여호와의 나라에로 돌이킴이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 아버지이 나라에로 돌이킴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곧 교회는 이스라엘처럼 바로 왕의 학대와 압제 속에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학대와 압제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자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하나도 남김이 없이 죽음의 바다에로 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좋아도 좋은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두 죽음의 권세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노릇을 하며 죽음의 종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마치 애굽에 모세를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죽음의 고통과 죄로 신음하는 것을 돌아보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편과 모세의 글을 다 이루심이었습니다. 구원역사의 성취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역사적 성취였으며 새 시대를 열게 하신 구원의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우리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어제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지진으로 말미암은 재난은 이 땅이 살기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며,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시작된 재난의 징조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안주할 곳이 아니며, 이 세상은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며,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아야 할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재난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도성이 어디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셔 승천하신 하늘 나라가 우리의 참 안식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러한 재난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의 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즐거움, 쾌락, 먹고 마심의 기쁨 이 모든 것은 모두 죽음에로 종결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애굽 왕의 채찍질과 학대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실상 더 큰 고통과 학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돌아보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은 자기 영광과 권세와 권리를 다 버리시고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낮아지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질고와 고통과 죽음을 친히 맛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다 체휼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죽음을 이긴 새 생명을 나타내 보이시고 증거하셨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승천하여 앉으심으로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모든 만민의 왕으로 오르셨습니다. 이 부활의 표적을 믿고 그를 따르는 백성에게 이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믿어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으라고 마가복음은 결론에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세처럼 발에서 신을 벗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제자 도마에게 보이셨고 도마가 그 몸에 손을 넣어 봄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는 사도들과 선배 신앙인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를 믿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사도들, 곧 어부였던 자들이 말을 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웅변가들도 아닌데 어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헬라 문명 아래 유명한 연설가들이 많았던 그 당시에 어떻게 복음을 담대히 증거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예루살렘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이 성령 안에서 사도들이 할 말을 그 입에 주셨습니다. 방언으로 15개국 사람들이 듣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모든 권세자들 앞에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습니까?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하는 큰 핍박 속에서도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자들은 더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이 임한 주님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가장 좋은 선물로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코자 하면 성령이 내 입에 말을 주실 것입니다. 내 입의 말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이 복음을 들고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합니까? 부활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증거를 통하여 우리들처럼 세상 왕을 섬겼던 것으로부터, 사단의 종으로부터, 죄와 죽음의 종으로 살던 것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어 하늘 나라로 인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일에 우리를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킬 것입니다. 만유의 주, 만왕의 왕되신 우리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제 정말 때가 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끝이 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젠 더 이상의 구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증거해야 할 일은 이제 마지막이 이르렀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성령 안에서 담대히 외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목적입니다. 이 영광의 일에 참여하셔서 풍성한 의의 열매를 가득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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