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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이키지 않는 어리석음 (잠 9:4-6, 행 3: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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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키지 않는 어리석음 (잠 9:4-6, 행 3:19-21)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처참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망연자실한 그들을 바라보면서 일본에 대한 애증이 얼마나 깊은가를 느끼게 됩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우리는 일본을 욕하면서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미워하면서 정이 든다고 그동안 미운정이 너무나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니 우리에게 미칠 직접적인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그들이 살 땅이 모자라 독도에 대한 욕심을 더 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의 움직임을 아무리 봐도 종말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 인류와 세계가 주님께로 돌아서는, 돌이키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일본의 지진이 우리와 먼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리히터규모 6도 정도의 지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지진이 난다면 엄청난 피해가 예상이 됩니다. 내진 설계가 된 빌딩이나 아파트도 그렇게 많지도 않을 것입니다. 혹시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난다면 새치기와 약탈이 없으려나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하나님 앞으로 돌이킵시다. 우리의 가던 길에서 돌아섭시다. 우리라도 돌아섭시다. 그리고 돌아서라고 어서 나가서 외칩시다. 돌아서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돌이키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길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는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먼 곳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돼지를 치고 쥐엄 열매를 먹고 살다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우리 모두가 탕자의 소질이 다 있습니다.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기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굶어죽겠구나”라는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 후에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는 몸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난 후에는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다 같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베드로도 가룟유다 만큼 예수님께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이켰습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는 돌이키는 자와 돌이키지 않는 자의 차이입니다. 
  
회개란 말의 히브리어는 ‘테슈바’이고 헬라어는 ‘메타노이아’입니다. 이 두 말은 다 같이 돌아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C. S. 루이스는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란 단어는 ‘페타임’이란 말로 생각이 단순해서 외부의 유혹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자를 말합니다. 어리석음은 확고한 마음이 없고, 분별력이 없는 인격적인 미숙함에 기인합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돌이킬 여지는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어리석다’(absurd)는 말은 귀머거리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surdus에서 나온 말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리석어집니다.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듣는 것은 초막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고대 수메르어에서 귀와 지혜는 동의어입니다. 지혜도 들음에서 납니다. 영국 속담에는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눈과는 달리 귀에는 꺼풀이 없습니다. 늘 열려 있습니다. 눈과 귀는 하나이지만 귀는 둘입니다. 두 번 들으라고 귀는 둘입니다. 눈과 입보다 귀가 중요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돌이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음식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4-5절에는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라고 합니다. 왜 갑자기 지혜 없는 자에게 먹고 마시는 말씀을 합니까? 하나님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없는 자’란 ‘헤사르 레브’라는 히브리어입니다. ‘마음이 결핍된’이란 뜻입니다.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지혜란 히브리 단어로는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살아가는 기술이 생깁니다. 
  
“내 식물을 먹으며”라는 말의 ‘식물’은 ‘라히미’인데 문자적으로는 ‘빵’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음식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없는 자들에게 돌아와서 함께 먹자고 권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다음에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만나입니다. 매일 아침 백성들은 눈을 뜨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그들은 신비한 기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만나가 누구에게 준 것입니까? 출애굽한 백성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선민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 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사람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은총을 받으려면 돌아와야 합니다. 쥐엄 열매를 먹던 탕자가 돌아와서 먹는 아버지 집의 맛은 꿀맛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은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먹는 문제는 심각한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메시야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에게 실컷 먹게 하신다는 메시야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먹는 게 목적이 아닌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떡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 전의 삶에서, 이전의 길에서 돌아온 입니다. 
  
‘돌아오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메시야의 식탁의 초대입니다. 돌아와서 먹으라는 초청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였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양이 아닙니다. 염소가 아닙니다. 돼지가 아닙니다. 늙은 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살진 송아지는 최고의 맛을 의미합니다. 최고로 맛있는 고기 잔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돌아온 자에게 주시는 특권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잔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돌아온 자들의 먹고 마시는 잔치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돌이킨 자가 누리는 지헤이며 특권입니다. 
  
오래 전에 그리스의 데살로니끼라는 도시에 가 보았습니다. 이 도시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인 데살로니가입니다. 이곳에 가면 성 디메트리우스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가면 재미있는 글귀가 있습니다. ‘소피아(지혜)가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소피아’ 즉 지혜를 찾으려고 무던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지혜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그 자체가 지혜이고 참 지혜가 생깁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 보다 누구하고 먹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사회적 맛이라고 합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당신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당신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돌이킨 자가 이 은혜를 받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목회하는 저의 동기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신학교 1학년 때 그 분의 아들이 천호동 동네에서 놀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리니 공부는 커녕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우리가 그 때는 다 가난하고 돈이 없을 때라 교통비도 못 도와드리고 기도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 저도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지금도 그 아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천호동에서 잃은 아들을 보름 만에 평택 어느 시설에서 찾아왔습니다. 아들을 찾아오기는 했는데 이 아들이 밤에 잠을 자다가도 깜짝깜짝 깨고, 밥을 먹을 때도 슬슬 눈치를 보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미어지더랍니다. 집에 돌아온 지 한 주간 만에 아들이 밥을 먹다가 “아빠” 그러더랍니다. 

친구 목사님이 하는 말이 그 때 “아빠”라는 한 마디 말이 그렇게 힘이 있는 말인 줄은 처음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답니다. 이 밥상은 잊을 수 없는 아들이 돌아온 밥상입니다. 이 밥상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밥상입니다. 이 밥상에서 비로소 아들은 몸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온 증거를 보인 것입니다. 
  
혹자는 이 말씀이 성만찬으로 초대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먹습니다. 이 성찬은 초대교회는 아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목숨을 건 예식이었습니다. 심지어 로마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문을 잠그고 자기들끼리 사람의 고기를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다고 하여 식인집단이라고 하여 순교의 빌미를 삼았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55:1에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식탁의 초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모두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식탁의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둘째,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해야 합니다. 

6절에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은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명철의 길을 행하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버리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니라’,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치는 버려야 얻습니다. 어리석음을 버려야 생명을 얻습니다. 어리석음을 버려야 명철을 얻습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버려야 지혜를 얻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우리의 목숨까지도 잃으면 얻는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치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버려야 얻는 것이 많습니다. 어리석음은 죽음과, 파멸과, 고통과, 미련함과, 불투명한 미래밖에 없습니다. 이 어리석음을 버리면 비로소 생명이 있고, 명철의 길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뱀잡이 수리’라는 독수리과의 새가 있습니다. 하늘 높이 날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와 낚아채는 맹금류입니다. 이 새가 내려와 땅에서 먹이를 먹고 있다가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의 습격을 받아 잡아먹히기 일쑤라고 합니다. 맹수가 나타나면 이 새가 뛰기 시작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보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잃는 일입니다. 명철을 버리는 일입니다. 
  
욥기 28:28에는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옛날에 로마의 시저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군사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시저는 군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 시저가 있지 않느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저가 폭풍을 이깁니까? 이 생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금번 일본의 대지진을 보며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일본은 세계 제일의 지진대비국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노력이나 대비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봤습니다. 이와테현 가마이시의 방파제는 길이 2km이고 높이가 30m입니다. 바닷속 63m 깊이에 설치한 해저방파제입니다. 이 방파제는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방파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방파제입니다. 쓰나미가 올 경우에 파도의 높이를 줄여 해안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기네스북에 오른 방파제로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제 가장 깊은 방파제도 쓰나미를 못 막았다고 기네스북에 오를 판입니다. 인간의 기술, 과학, 지식, 정보에 우리의 삶을, 우리의 생명을 의존하고 살겠습니까? 그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해야 생명을 보존하고 얻습니다.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악은 언제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악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선은 그 자체가 지혜로움입니다. 악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악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어리석음도 가까이 있습니다. 악은 항상 가까이 있으므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곁의 악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센 물결을 거슬러 가는 힘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0에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지혜가 커지면 어리석음이 작아집니다. 지혜에 어른이 되면 악에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명철의 길’은 지혜의 교훈을 통해 지시된 길입니다. 지혜와 교훈을 얻는 길입니다. ‘얻으라’는 말씀은 어리석음을 버리는 소극적 행동뿐만 아니라 명철의 길을 행하는 적극적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명철을 얻으려면 적극적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요나 3:10에는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인류가 빨리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연의 재앙을 돌이키십니다. 그래야 인류가 만든 핵의 재앙을 돌이키십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이 찬송가의 애절한 소리 듣고 돌아와야 합니다. 속히 돌이켜야 지혜입니다. 이 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합니다. 
  
쉔키비츠의 ‘쿼바디스’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의 전도가 너무 힘을 들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비아 아피아’ 길에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을 만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어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네가 싫어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 그 때 베드로는 다시 돌이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합니다. 명철의 길은 죽음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길은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입니다. 

  
결론 

이번 일본 지진에서 한국인 생존자 김광일씨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분은 센다이시 가모지구의 해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집이 있었습니다. 1998년에 선배를 도우려 일본에 갔다가 마요코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초등학교 1학년 딸과 1살 된 쌍둥이남매가 있습니다. 아내는 커튼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지진이 나자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쓰나미가 밀려오는 소리가 나서 아내가 일하는 곳으로 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로 뛰었습니다. 

그런데 계단에 도착하기 전에 물결에 휩쓸려 아내를 껴안았지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물속에 있었고 7, 8미터나 되는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농구대 난간을 붙잡고 수 시간을 버텨 체육관으로 왔습니다. 자신이 물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다음날 9시간이나 걸려 아이들을 데리러 온 장인장모가 데려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를 제가 억지로 데리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천당에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으니...저를 살려주신 건 어딘가 쓸 일이 있어서겠죠. 아이들을 위해서 힘을 내고 살겠습니다”. 

김광일씨에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기를 빕니다. 이 분은 일본에 가서 큰 일을 했습니다. 아내의 삶의 방향, 인생의 길을 완전히 돌이키게 해준 남편입니다. 그것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돌이켜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위로입니다. 아직도 돌이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음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복음을 심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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