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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크심과 나의 작음 (시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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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크심과 나의 작음 (시 8:1-9)


시편 150편 가운데 8편, 19편, 104편은 자연에 대한 신앙 감탄 시로 기록되었습니다. 말씀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를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우주의 신비를 많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하는데 제가 배우는 과학 교과서에 달 표면의 검은 부분이 바다라고 교과서에 나왔고 우리들도 그렇게 배웠는데 지금은 인류의 달 정복이라는 과학이 달의 신비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휴스턴의 항공우주국 NASA에 가시면 달에서 가져온 돌멩이를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유리관 속에 전시해 놨기 때문에 쉽게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얼마 안가서 일반인의 우주여행이 현실화 된다고 합니다. 이제 여행사에서 모집 광고를 낼지 모릅니다. “우주 여행하는데 비용이 얼마입니다. 몇 월 며칠에 떠나니까 신청하십시오.” 이런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또 몇 십 년 후에 현실화 된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45억6천만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쉬지 않고 변하여 왔고 지금도 쉬지 않고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각 변동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가끔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는데 지구 조판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가 지금도 쉬지 않고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입니다. 

앞으로 지구 안에는 바다에 침몰되어 없어지는 나라도 생기게 되고 새로운 육지가 솟아나기도 하고 한반도 땅과 일본 땅이 붙을 지도 모릅니다. 일본은 벌써 오래 전부터 바다 침몰설을 막기 위해서 인공 육지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6,500만 년 전에 지구의 운석 충돌이 생겨서 그때 공룡을 비롯한 70퍼센트의 지구 종류의 생명체가 멸종이 되고 거기에 따라서 또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또 지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이렇게 사람 살기에 적합한 이유는 태양계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아니한 알맞은 거리에 존재하기 때문에 태양 에너지의 혜택으로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많고 많은 창조물 가운데 지구가 제일 축복받은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신앙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감탄의 시를 쓴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너무 커서 사람들은 그 크신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고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가 생긴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태양을 보고 태양신을 만든 문명이 고대 이집트, 그리고 잉카 문명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국기를 보십시오. 국기의 빨간 원은 태양입니다. “아마데라스 오미카 천황은 태양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 시편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세 가지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너무나도 놀라고 있습니다.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구름을 자기 수레로 삼으시고 하늘을 자기 휘장 같이 치시며”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가 얼마나 크기에 광대하다고 표현했는가? 

사실 천문학자들도 이게 너무나도 엄청난 크기라서 천문학자마다 말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대략적인 것은 우리가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 여행가실 때 타고 가시는 비행기가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이틀 걸립니다. 지구는 3만 마일입니다. 빛은 얼마나 빠른가?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일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고 배웠습니다. 일초에 22만 5천 마일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그 빛을 올라탔습니다. 이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가 얼마나 큰 곳인가 구경하려고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렇게 빠른, 일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속도로 우주여행을 떠났는데 그 사람이 100살이 되었는데 끝이 안 났습니다. 1000살이 되었는데도 끝이 안 났습니다. 1억 살이 되었는데도 어림도 없습니다. 100억 살이 될 때까지 갔는데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지쳤습니다. ‘아! 우주의 넓이는 200억 광년이다.’ 그렇게 끝을 내고 “나는 여기서 지쳐서 쉴 테니 다음 세대에 오는 사람이 가십시오.” 이것이 현대 과학입니다. 

“우주의 넓이는 200억 광년이다. 더 넓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모르겠다. 다음 세대가 규정하라.”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렇게 긴 시간을 가는 넓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주이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해서 우주는 팽창합니다. 빛의 속도만큼 팽창해 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인간의 머리로서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이 우주가 너무 커서 대우주와 소우주로 구분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주를 은하계라고 하는데 넓이가 약 10만 광년, 두께가 약 2만 광년, 그래서 쟁반같이 생긴 것을 소우주라고 합니다. 이 안에는 약 1천억 개의 별들이 은하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 알파겐타우루스에 가려고 해도 4년 4개월이 걸립니다. 북극성까지는 800년 이 걸립니다. 우리 눈에 지금 북극성이 반짝반짝 하는 것은 800년 전의 빛이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인간 생활의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태양 하나만 해도 지구보다 130만 배나 큰 수소 폭발하는 불덩어리입니다. 

그런데 1억4천9백6십만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저렇게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구보다 130만 배의 불덩어리가 항상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은하계 하나만 해도 그렇게 큰데 1천억 개의 별이 있습니다. 또, 그런 쟁반 같은 은하계가 천억 개나 널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도 크셔서 이 시편을 쓴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크시도다.” 이것으로 끝냈습니다.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까?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워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그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뭐라고 합니까? “크시도다 주 하나님!” 그러면서 끝납니다. 너무 크셔서 “크시도다. 광대하시도다.” 거기에 이 시편을 쓴 사람은 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놀람은 뭔가? 그렇게 큰 우주에 비해서 나의 존재는 너무나 작은 것을 보고 놀랍니다. 사실 천문학 서적을 읽다보면 지구인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지구가 얼마나 작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 안에서 지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먼지 하나같습니다. 볼펜으로 점 하나 찍은 거 될까 말까입니다. 이 지구가 이렇게 큰데도 아주 점수를 후하게 많이 주어야 우주 안의 지구는 골프공 하나 만하다고 할까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밥풀 하나 붙은 것 같이 작은 지구에서 한국을 찾아보십시오.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서 성남시!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매동 360-1번지! 거기서 이필재는 어디 있는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나의 작음의 비교가 놀랍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작은가? 이 지구는 왜 이렇게 조그만가?’ 인간의 손으로 건축한 가장 큰 건물인 시카고의 씨어스타워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둘 다 제가 올라가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삼성 기업이 건축한 세계 제일의 두바이 빌딩도 아프리카를 가다가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내렸는데 완성되지 않아서 올라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빌딩에 올라가 봐서 내려다 봐도 인간의 모습이 개미들 기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인간들 사는 것이 소꿉장난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보고 “이 버러지 같은 야곱아! 까불지 말고 좀 있어라. 저는 진흙 속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에 불과하다.” 

우리 어느 때 인간은 벌레만도 못하고 티끌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욥기서에 보십시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도다.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그가 물을 가늘게 끌어 올리신 즉 그것이 안개가 되어 비를 내려주고 그것이 공증에 내려 사람에게 쏟아지니 번갯빛으로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로다.” 

시편 19편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나님은 크시니 그 앞에 잠잠할 지어다. 우리 인간이 최고 길게 살아야 100년을 사는데 이 100년이라는 인간 편에서 긴 시간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밤의 한 경점으로 ‘딸깍’하고 지나가는 그것이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천년을 산다 해도 하나님의 하루만도 못한 비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주에 비해서 먼지만도 못한 지구입니다. 그 대기권 안에서 겨우 땅을 파서 농사 지어 먹고 살다가 죽는 티끌 같은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 사람이 놀랐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렇게 크신가? 어떻게 나는 이렇게 작은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는 누구나 흥미롭게 보는 거 같습니다. 저도 흥미롭게 보는데 어떤 때는 돋보기 쓰고 봐야 할 만한 조그만 개미들이 온통 난리를 치고 무엇을 합니다. 그 개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제가 생각을 합니다. ‘저것도 기분 나쁜 것을 알까? 자기들을 무엇을 성공했다고 축하하고 실패했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알까?’ 그런데 다 안단 말입니다. 너무 크신 하나님과 너무 작은 인간의 비교를 깨닫고 이 사람은 지금 놀라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이 말했지 않습니까? 사실 이 지구 안에도 몇 사람들이 우주에 가서 지구를 바라보지 않았습니까? 몇 사람 안 되지만 우주인들은 다 우주에 가서 지구를 육안의 눈으로 바라봤는데 기자들이 첫 번 느낌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제일 많이 말한 것이 축구공 같다고 했습니다. 지구가 축구공 만하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세 번째 더 큰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이렇게 작은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도 큰 관심 때문에 놀랐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저를 돌보시나이까?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 이렇게 작은 나를 어찌 생각하고 날마다 세밀하게 관심하시니까?” 거기에 또 놀랐습니다. 세 번 놀란 것입니다. 

2부 예배 마치고 쇼트트랙 국가 대표 선수가 시합에 나간다고 저한테 와서 안수기도를 받고 갔습니다. 그런데 국가 대표 선수들이 해외에 가서 우승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국위 선양했다고 나라에서 선수의 집으로 전화를 한통 걸어준답니다. 전에 국가 대표선수이셨던 집사님께 직접 들은 말인데 보통 그런 일은 대통령 영부인께서 맡아서 하신답니다. 그런데 그분한테도 언제 집에 전화할 테니 기다리라고 해서 집안 식구들이 전부 모여서 청와대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물으니 “평생 그렇게 기분 좋은 날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으로 받았습니다.” 

저도 대통령 초대 몇 번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통령한테 초대받았을 때 바쁘다고 안 간다고 하는 사람 한명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 갑니다. 왜 그럽니까? 크신 분이 너무 작은 나에게 관심 주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 처음 만난 것이 제가 신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했을 때 윤보선 대통령 출석하시던 교회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습니다. 청년 예배드리니까 신학교 학생회장을 보내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이니까 가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 제가 22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잘했나봅니다. 대통령 부부께서 앞으로 오셔서 “장래 훌륭한 목회자가 되겠소.” 그때 제가 22살 때 대통령 부부의 악수를 받고 그때 솔직히 손 안 씻으려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큰 인물이 작은 인물을 기억하고 관심하는데 감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 시편을 기록한 이 사람은 지금 우주를 창조하신 그토록 크신 하나님이 티끌만도 못한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지 나타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머리털 몇 개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컴퓨터로 계산해 보니까 6만개 정도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머리카락 몇 개인지까지 세고 계신 세밀한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나옵니다. 거기에 이 사람이 놀라는 겁니다. 우주에 비해서 지구가 그토록 작은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이나 크게 우주를 지으셨는가? 그 정도 크게 지으셔야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천지를 분별했고 별의 움직임 따라 뱃길의 방향을 정했지 않습니까? 지구보다 130만 배나 큰 더 큰 불덩어리를 날마다 수소로 폭발시켜 주어야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그 열과 빛으로 먹고 살 수가 있어야 결국 이 우주의 창조물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셨는데 그렇게 크고 광대한 우주와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비교하셨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천억 개의 소우주로 형성된 이 큰 우주보다 네가 더 중요해!”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관심입니다. 거기에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말이 시편으로 나온 것입니다. 

왜 그런 비교를 하셨는가? 이것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우주 안에 어느 천체도 가시지 아니하시고 지구에 오신 것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셔서 나사렛 땅에서 성장하시고 인간을 만나주시고 구원의 진리를 주시는 작업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토록 많은 천체 가운데 가장 조그만 지구로 오셨는가? 지구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 하셨는데 왜 좋은가? 그것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우리 자연의 생태계라고 하는 이 조화는 인간의 삶을 철저히 도와주는 원리로 되어 있는데 현대 과학의 논란이 되어 왔지 않습니까? “동양인들의 자연 순응적 삶이 옳은 것이냐, 서구인들이 자연 정복적 삶이 좋은 것이냐?” 서양인들은 “창세기에 봐라! 하나님이 이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으니까 얼마든지 개발해도 좋다. 정복하는 것이다. 괜찮다.” 이런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동양인들은 자연 순응적 삶으로 자연을 보호하면서 그냥 살았습니다. 길이 꾸불꾸불해도 그냥 꾸불꾸불한 채로 살았지 똑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결론합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자연이 사람 생명에 좋은 것이 되도록 지혜롭게 관리하는 것이 가장 선이다. 만약 자연 정복이 지나쳐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생명을 헤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악이다.” 그래서 요즘 자연 친화적 사역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좋아야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에게 가장 지극한 사랑을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광대한 다른 어떤 창조물보다도 인간을 더 사랑하시고 그 인간이 복되게 사는데 필요한 조건으로서의 우주 창조 조합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신비를 깨달은 사람이 ‘아!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나이까?’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인간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런 서열을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됨의 축복과 자존심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200년을 달려가도 끝이 안 나오는 광대한 우주는 결국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2억4천9백60만km의 거리에 있는 태양이라는 저 수소 폭발을 억만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대로 마련해 놓아야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지구에서 그 열과 빛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교만하고 너무 크신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적인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의 개념이 이 세상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이 우주 창조에 비추어본 한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장엄한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마지막 말을 이렇게 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천하보다 귀하다고 정의하신 인간의 생명! 하나님의 최대 축복의 대상이 된 인간! 오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감격! 일천억 개의 별과 일천억 개의 소우주로 형성된 대우주 안에서 그것보다 내가 더 귀하다는 하나님의 인정이 주어진 나! 그 신비를 깨달은 신앙 고백이 바로 오늘 시편 8편입니다. 그 감격, 하나님 자녀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주 안에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서있는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 감격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이 넓고 넓은 우주를 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으며 이것보다 너를 더 귀하게 여기노라.”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가슴에 안고 세상을 이기어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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