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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제자들이 따랐더니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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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따랐더니 (마 8:23-27)


몇 년 전, 지방회 행사에 참여 할 때였습니다. 어떤 30대의 젊은 집사님이 와서 인사를 하는 거에요.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목사님 제자에요”,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신학대학 시절에 교회학교 교사를 했는데, 그때 유년부 2학년을 맡았었습니다. 처음에 7명으로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36명까지 부흥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내 양팔에 꼬마들이 매달려 다녔었어요. 당시에 내 팔에 매달렸었던 여자 아이가 바로 그 집사님이었던 것입니다. 굉장히 듣기 좋은 말이더라고요. “저 목사님 제자에요”라는 말이.. 이 말이 당시 귀에 남았었습니다. 

사순절 셋째 주를 맞은 오늘의 말씀은 제자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따르다’(아콜루테오)는 동사입니다.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23) ‘진리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당시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는 외적인 것만 보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것이 신기해서, 진리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이 덮어놓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고생하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많은 실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제자됨에 관한 2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8~20절)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2) (21~22절) 

제자 중 한 사람이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두 말씀 다음에 오늘 본문, (23~27절)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그 다음에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서의 말씀들을 보면, (막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 ”, (눅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 ” 

그냥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만 굳이 예수께서 오르시자 제자들이 따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들에 대한 관심이 유독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따르다’라는 동사도 많이 나옵니다. 이 ‘따르다’는 단어는 곧 제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 지난 주일의 본문 말씀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이방의 갈릴리’라는 가버나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어부로 두 형제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4:19) “...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그러니까 (20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바로 그 두 형제, 곧 시몬(베드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 그리고는 또 예수님이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이 그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러자 (22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이 따릅니다. 

이 본문 후, 마5~7장까지 산상수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산상수훈 바로 앞의 구절 4장 25절에도 마지막에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으로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5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기록하여 산상수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10장은 12제자를 부르시고, 그 제자들에게 하시는 설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 

마16장에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곧 제자에 대한 말씀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제자됨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두 가지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1.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인생의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더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오게 된 것은 앞에서 예수님이 보여준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 8장에서 예수님은 몇 가지 이적들을 통해 그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2~4절) 

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 (5~13절)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원거리에서 고치신 것, (14~15절)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 (16~17절) 

여러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치심. 
계속되는 놀라운 이적들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그 당시 그 이적의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만일에 오늘날과 같이 매스컴이 발달되어 있는 시대에 이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면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적은 엄청난 권능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적들을 함께 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19절) 한 서기관 -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 ‘지금 당장 따르겠습니다.’, 

(21절) 또 다른 한 사람 -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런 두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각기 다른 답변을 주십니다. 먼저,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곧 나를 따르는 것은 엄청난 고생길이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따르겠다던 그 제자에게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따르려면 딴소리 말고 먼저 따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는 따르지 말라 하시고,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먼저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속마음과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데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려면 확실히 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흔히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 내 욕심, 내 욕망,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으면 내 소원은 억제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하면 반드시 고난이 오고, 유혹이 오고, 시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 그래도 예수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 믿으면 환경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데, 아니 더 어려워졌는데도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고 담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좇아 삶으로 결국은 범사가 잘 되고 형통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적인 복을 받고자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저절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 자체가 예수 믿음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은 예수 믿음의 과정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 권사, 집사가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니까 교회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직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봅니다. 

(23~24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했는데, 인생의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서 나의 배가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인생의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광풍의 바다 한 가운데서 죽음의 위협 앞에 직면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고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2. 인생의 고난이 왔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깨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라는 바다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큰 호수입니다. 그 산중에 헐몬(헤르몬)산이라는 큰 산이 있습니다. 높이가 무려 2,760미터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그 산에는 항상 눈이 덮여 있습니다. 헐몬 산의 물은 좁은 협곡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는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상당히 덥습니다. 이 찬물이 헐몬 산에서부터 내려오면 아열대성의 더운 갈릴리 바다의 표면 물과 부딪히면서 예고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풍랑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 이 갈릴리 바다야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적절한 상징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삶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풍랑은 우리의 인생에서 쉴 새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풍랑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풍랑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을 맞더라도 뚫고 나갈 수가 있다,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큰 놀’이었습니다. 그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될 정도의 큰 파도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큰 광풍’(막4:37)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이라는 형용사는 헬라어로 ‘메갈레’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쉽게 말하자면 메가톤급 풍랑이라는 뜻입니다. 거대한 풍랑, 삶의 근본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풍랑,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정도의 거센 풍랑이 제자들을 덮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예수를 믿어도 내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닥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되고, 사업에 실패하여 절망하기도 하고, 자녀로 인하여 낙심하기도 하고, 인간관계의 오해로 인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일이 꼬이고 어려워집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24절)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시는 한 그 배는 절대 침몰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곳에 복음이 있습니다. 주님계신 배는 폭풍우는 만날 수 있어도 결코 물에 빠져 파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그 폭풍우 속에서도, 모두가 죽게 된 그 급박한 순간까지도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다급하게 깨우고 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절) 

인생의 고난이 왔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까?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배 안에 영원토록 함께 계심을 믿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주님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까? 말씀 안에 거하면서 기도함으로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송영인’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고, 세상에서는 소위 잘 나가는 여자였습니다. 37세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사상 최연소 정교수가 되고, 미 전국 아시아계 교수 협회 회장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문위원과 조지 부시 대통령 아시아계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국민대 총장을 지냈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잘 나가던 이 여자에게 어느 날, 엄청난 시련이 닥칩니다. 바쁘게 지내는 가운데, 자꾸 기침이 나오고 심한 피곤함을 느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처음에는 ‘천식성 알러지’라는 진단을 받았고,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아 정밀 검사를 받았더니, 폐암 말기로 길어야 2개월 밖에 못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혹시 저 같은 경우에 산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생존 가능성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도 열심히 나가 신앙생활을 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고, 정말로 열심히 살아왔었기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인데, 너무나 허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천국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고서도, “이게 아닌데, 절대로 아닌데... 아직 끝날 수는 없는데... ”, 

주일에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데, 그날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사로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특별히 다가왔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니라” 

이때부터 주님만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 고난이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믿기에 어떤 순간에도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옵소서. 주여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면, 이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옵소서.”, 그날 이후로 힘든 투병생활을 하며, 말씀을 깊이 보기 시작했고,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생존확률 0%에서 완전히 치유함을 받은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써서 ‘두란노’ 출판사에서 냈는데, 그 책 제목이 “하나님이 고치셨어요”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인생의 고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이 왔을 때 주님의 제자들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깨우므로 그 고난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서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참된 평안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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