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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큰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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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눅 18:35-43)


어떤 목사님이 교인과 같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목사님이 자꾸 조니까 이 교인이 목사님을 깨우면서 "목사님, 성경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인이 말하기를 "목사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마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요."
"예, 그렇지요."
"그런데 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마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가만히 퀴즈 내용을 듣고 있던 목사님이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이 교인이 말합니다.  "에이, 목사님, 틀렸어요."
"틀리다니요.  성경에 분명히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그랬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때 이 교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너 나 보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내 인생의 미래가 보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앞에 엎드려서 이런 절절한 고백을 쏟아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보는 것일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사랑하는 내 가족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았으면.  다른 사람의 얼굴은 고사하고라도 내 얼굴이라도 한 번 보았으면.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이 경이로움에 감사하십시오.  고마워하십시오.

중도 실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건강한 눈을 가졌지만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 불의 사고나 질병으로 실명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중도 실명된 사람이 1년에 약 2천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건강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감사하셔야 합니다.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셔야 합니다.  어디 이것이 내가 잘나서 보입니까?  내가 실력이 있어서 보입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은혜로 고백할 줄 아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리고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성지 순례를 하게 되면, 예루살렘에서부터 사해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광막한 유대 사막인 광야가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광야를 다 내려가면 아름다운 도시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곳이 여리고입니다.  사막에 둘러싸여 있지만 사막 지대에서는 비교적 수목이 우거진 도시, 향나무도 있고 뽕나무도 많고 장미나무도 있고 종려나무도 우거진 그런 도시입니다.  나무가 많은 도시, 그래서 냄새가 좋은 도시입니다.  '여리고' 라는 말은 냄새라는 뜻입니다.  향그러운 냄새가 가득한 도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도시를 가리켜서 '장미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던 이 사람, 그는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었겠습니까?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불행한 사람 앞에서 하루는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도 언제나 거룩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파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이 곳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거룩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구원을 향한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에게는 자기의 영혼을 흔드는 기대감과 호기심이 몰려와야 합니다.  삶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기대와 호기심의 첫 출발점입니다.  기대감이 없는 인생, 호기심이 없는 인생은 제일 불쌍한 인생입니다.  무릇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기대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님이 주시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여러분을 떨게 만들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크고 은밀한 일들이 보여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오랫동안 같은 방법으로 같은 시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자기를 잡아당기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싶도록 만드는 마음입니다.  맹자에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맹자에 나오는 '포기'라는 단어는 사나울 포(暴)자에 버릴 기(棄)자를 써서 자신에게 사납게 대하고, 자신을 버리는 행위라는 뜻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포악하고 자신을 내팽개쳐 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자포자기라고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 더욱 강해지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포기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을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여러분의 영혼에 기대감이 쓰나미처럼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감이 느껴지고 보여지기를 축복합니다.  항상 해 왔던 대로만 살면 얻을 것도 없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보다 나아질 것도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에게는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하는 변화에 대한 거룩한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 영혼에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십시오.  오늘 그 생명에 호기심을 일으키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일어날 때에 내 영혼을 치고 일어나는 호기심에 붙잡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구걸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무나 붙잡고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 때 사람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나사렛 예수"  처음 들어보는 음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기대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호기심이 자기를 충동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나도 볼 수 있을까?  그 분이 나를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그 분을 본다고 하면 어떤 일이 있을까?  그 분이 사람의 병을 고친다고 하든데, 그 분이 소경의 눈도 밝힌다는데, 그 분이 흑암에 갇힌 자를 나오게 한다는데, 그 분은 어떤 분일까?

잠시 상념에 잠겨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념할 때가 아닙니다.  머뭇거릴 때도 아닙니다.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변화를 위해서 뭔가를 두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 분을 만날 수가 있을까?  내 의견과 내 뜻이 어떻게 그 분에게 전달될까?  내가 그 분을 볼 수 없으니 그 분이 나를 볼 수는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예배하는 우리의 심정입니다.  내가 그 분을 못 보는데 그 분인들 나를 볼까?  그냥 더듬으면서 실수하더라도 어딘가를 달려가면서 나도 소리를 쳐볼까?  그러나 어느 쪽에 계시는지.  그 때 무엇보다도 마음에는 분명한 자기 결단이 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기회는 놓칠 수 없는 내 삶의 기회이다.  그렇게 결단이 서는 순간 소란이 일어납니다.  소리를 칩니다.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시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결단력입니다.  결단력의 첫 발걸음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에 결단이 일어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거룩한 결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리라!"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붙잡고 한 번 살아보리라!"  그래서 교회에 올 때의 마음과 갈 때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의 가치관과 갈 때의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그냥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분산시킵니다.  잡아당깁니다.  망설이게 만듭니다.  주저앉게 만듭니다.  저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만약 사랑이라고 하면 그 분이 왜 나를 먼저 기억하지 못할까?  그 분이 왜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태어나게 했을까?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자기 마음에 원한이 옵니다.  불평도 옵니다.  어둡고 캄캄한 먹구름이 영혼을 휘감아오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마음에는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다스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는 언제나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원망과 불평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 몸에 육신의 법과 성령의 법이 함께 있다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그 늪에서 계속 불행만을 고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하고 싶다는 마음, 이 두 가지의 마음이 언제나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법이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스려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하늘의 독수리가 갑자기 땅으로 내려오더니 고양이를 낚아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친구는 "오늘은 고양이 제삿날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늘은 독수리 잔칫날이네."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장미덩쿨 속에서도 가시덩쿨만 봅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가시덤불 속에서도 장미를 봅니다.  불행과 행복은 자기 마음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가시를 보지 말고 인생의 장미를 보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얽혀있는 이 인생의 숲에서 장미를 보느냐, 가시를 보느냐 이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던 이 소경, 그의 마음 속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힘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랜만에 모든 불평과 두려움으로부터 뛰어넘을 수 있는 뜨거운 기대감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다보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힘이 나를 사로잡는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가 나를 휘감으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거룩한 기대감으로 충만해 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지금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강권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심령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기대감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올 때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말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충만한 이 소경,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여기 보이십니까?  여기 이 불쌍한 사람이 보이십니까?  예수님, 제가 기억되십니까?"

부르짖을수록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답답했지만, 부르짖을수록 소리치는 동안에 저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저 분만 만나면, 저 분이 나를 불쌍하게 여기기만 한다면 내 삶에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그런 자기 기대감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도 살 길이 있다.  이제 나도 변할 길이 있다.  이제 나도 사랑 받는 길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이 소경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일어서기 시작할 때 사탄은 먼저 내 속에서 절망의 소리로 주저앉히려고 합니다.  "너는 안돼.  너는 너무 늦었어."  "네가 볼 수 있다고?  네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네가 변할 수 있다고?  허망한 꿈을 버려.  포기해.  체념해."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살다보면 절망의 나락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사랑의 길이란, 내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권능에 생포되는 것입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어떤 기대감으로 충만해 질 때 사탄은 절망의 음성으로 우리의 기대감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그때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십시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아니면 주변에서 나를 주저앉게 하려고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영감으로 주시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 외에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힘이 자꾸만 나를 주저앉게 하려고 할 때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일어나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목사인 저는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기적은 오늘도 일어납니다.  기적 중에 제일 위대한 기적은 우리가 진리를 만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적입니다.  "네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하게 하리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소경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원과 비애와 통곡과 간청과 생명보다 더 깊은 진실한 절규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내 생애에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은 음성이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도 들려지기를 축복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 보고 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도 본다고 하는 삶의 경이로움을 한 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이 흑암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걸인의 인생에서 변화되고 싶습니다.  주님만이 제 삶의 소망입니다.  세상이 보고 싶습니다.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형제가 보고 싶습니다.  자연도 보고 싶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 속에서 더듬으면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 남은 생애를 밝게 살고 싶습니다.  내 남은 생애를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내 남은 생애를 나도 남의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내 남은 생애를 나도 남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내 과거가 어떻든 묻어버리고 밝은 미래를 살아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눈을 떴을 때에 매 순간마다, 매 사건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물건을 만질 때마다 경험되게 되는 이 놀라움, 이 경이로움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 보인다.  보여!"  이 소경의 이 감격, 이 감사, 이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일단 감사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훈련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변화를 위한 것인데 감사의 눈이 열려야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 제일 쓸모 없는 믿음은 감사를 잃어버린 믿음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병든 믿음,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감사입니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순간 순간 감지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이 감사의 지도가 그려지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가 고백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의 사건이 마가복음 10장 46절에서 52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기자는 이 소경의 이름이 바디매오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한 맹인"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저자인 누가는 그 한 맹인이 바로 나 자신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맹인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주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야단법석을 떨었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야단법석을 떨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거룩한 변화를 위해서 야단법석을 떨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발견하리라."  "주님이 나를 찾아내리라."  주님을 찾는 일에 야단법석을 떠십시오.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일에 야단법석을 떠십시오.  가만히 앉아서는 어떤 은혜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사로잡혀 외치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 눈을 열어 내일을 보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과거를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 꿈을 안고 달리십시오.  모든 지난날을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 주님의 능력에 취하여서 달려가십시오.  무엇보다도 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자기 습관과 맞서십시오.  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두려움과도 맞서십시오.  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태만과도 맞서십시오.  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무관심과 맞서십시오.  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쾌락과 맞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앞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시험 들지 마십시오.  사소한 감정에 무너지지 마십시오.  위대한 사명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사람은 위대한 일에 몰입할 때 사소한 일들로부터 해방됩니다.  사람은 위대한 일에 자기를 몰입시킬 때에 시시하고 너절한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미래를 설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서운 냉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라는 선지자를 압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서 그는 페르시아의 왕궁 비서의 자리를 내버리고 고난받는 삶으로 지치고 환멸에 차 있는 자기 백성들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을 지읍시다.  우리의 후대를 일으켜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헌신을 해서 후대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럴 때에 제일 무서운 일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의 무관심입니다.  사람들의 태만과 불충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들 속에는 언제나 수많은 저항 세력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나 인류 역사를 보면, 사실 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된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일하지 않았습니다.  협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해방꾼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21세기는 팀웍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에도 일류대학의 일류 엘리트만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얼마나 팀웍을 잘 이룰 수 있는가를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팀웍의 제일 무서운 죄가 뭔지 아십니까?  태만입니다.  무관심입니다.  불충성입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네가 이것을 알아라!  말세에 네가 고통할 때가 이른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한 것보다 더 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네 속에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다."

마지막에 원어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붙들고 일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지쳐서 아무 일도 못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사람들로부터 "너는 떠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꿈과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꿈을 꾸셔야 합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향한 꿈을 품으셔야 합니다.  자손의 후대를 향한 꿈을 꾸셔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하는 남이 감지하지 못한 환상을 품으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더 큰 일을 준비하셨고, 우리는 더 큰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 성산에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일으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첫 사랑과 첫 은혜를 회복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영에 취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서 오열하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별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부름'이라고 하는 원어의 뜻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태만한 것, 불충실한 것, 불확실한 것, 무관심한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나님을 붙들고 도전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태만하게 되는 것, 무관심하게 되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주님과 함께 도전한다고 하는 것이 부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무관심과 태만과 불충성의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기대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관심과 태만과 불충성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하포모에 가입된 사람들입니다.  하포모, 하나님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  하포모에 가입된 사람들은 플로린스 케네디의 말을 들으십시오.
"가장 큰 죄악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다."

여름철 개천에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범람하면 물이 흐르는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삭막한 벌판, 메마른 영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범람의 역사가 한 번만이라도 일어나면 그 길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이곳에 거대한 성령의 홍수가 여러분의 심령 심령마다 휘몰아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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