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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기만 하라 (눅 8: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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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라 (눅 8:40-56)  


1. 예수께서 갈릴리 건너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 이르자 공동묘지에 살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동네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 나오는 힘인지 그 쇠사슬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미치광이로 변해버립니다. 결국 이 사람은 밤낮을 공동묘지와 산 속을 미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귀신들려 미치광이가 된 사람이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막5:7)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들린 사람이 이렇게 외친 이유는 이미 그가 달려오기 전에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자 그 사람이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맑은 정신으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행하신 큰 일과 어떻게 너를 불쌍히 여기셨는가를 가족에게 알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수많은 군중들이 바닷가에 계시는 예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어 갑니다. 제발 오셔서 손을 얹어 살려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허락하시고 그를 따라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가며 밀어닥쳤습니다. 그런데 사력을 다해 그 밀집된 군중들 틈을 헤집고 예수께 다가오는 손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혈루병은 문둥병 다음으로 저주스러운 불치병으로, 이 병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은 12년간 병치레하면서 민간요법은 물론 당시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날로 병만 악화되어가고 많은 가산마저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절망과 고통, 그리고 그로인한 고독에 몸서리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듯 눈이 번쩍 뜨이는 너무나 좋은 ‘소문’,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쓸 돈도 없지만 인생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에 더러운 귀신이 들려 미친광이가 되어 날뛰던 사람을 고치신 ‘예수의 소문’(막5:1-20)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시라면 자신의 12년 병고의 쇠고랑을 능히 끊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 가시는 발걸음을 쫓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의 옷에 손만 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다가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오직 예수만이 ‘구세주’라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애절한 심정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그 순간 ‘혈루의 근원이 곧 말라버렸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대로 혈루병이 즉각 치료되었습니다. 예수께 치유를 간청한 적도 없고, 예수께 자신의 믿음을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과 고통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상(病狀)이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의 모든 행보(行步)를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소리없이 절규하며 자신을 찾아오는 그 여인의 눈물겨운 소원과 남몰래 다가오는 믿음의 행로(行路)를 그 소란한 가운데서도 조용히 기다리며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말과 행동,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 인격을 모두 아시며 세밀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인생의 남모르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의 애절한 소원과 그에 따른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아니하시고 잠잠히 보고 계십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부정한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여인의 숨겨진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린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는 말씀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나이를 볼 때 예수께서 ‘딸’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딸아” 이렇게 부르신 것은 그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로써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선언하시고 건강함으로 축복하셨습니다. 


2. 바로 이렇게 그 여인에게 마지막 축복의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시겠습니까?’ 라며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던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막 병에서 치유된 여인에 대한 축하 분위기에 한껏 기대가 부풀었는데, 뜻하지 않은 비보(sad news)를 듣고 일순간에 앞이 깜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손 쓸 필요도 없이 죽어버렸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오시게 해서 귀찮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는 분명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는 과연 이 사건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몰려든 무리들 때문에 지체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가는 도중에 12년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죽어가는 딸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것들이 야속하게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아마도 회당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야이로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읽고 계시는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는 12년 혈루증 병자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치유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믿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원망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믿기만 하라”, 먼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 때의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것입니다.(사26:3-4,사4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깊은 물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소멸하지 못할 것이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며 너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룩한 자이니라. 

내가 너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여겨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다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네 생명을 구하겠노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사43:1-5) 여러분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믿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고 살라는 것입니다.(롬4:20-21) 

주변 환경을 보고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12년 혈루병 병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만 만졌어도 치유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회당장 야이로로 하여금 죽음에 절망하거나 요동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고 지속적으로 믿음을 가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루어 주시고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가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당도하시자 통곡하는 소리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유력 인사의 외동딸이 죽었기 때문에 가족친지들은 물론 수많은 조문객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당시 회당은 집회는 물론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 역할을 했고, 법적인 문제에 대해 재판소 역할도 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회당의 수반이 바로 회당장이기 때문에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을 보존하고 운용에 책임을 가졌습니다. 예배 질서 유지를 책임지고 율법 낭독자와 설교자를 선정하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회당장은 그 지방에서는 최고 상류 계층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그것도 꽃다운 12살 어린 나이에 외동딸이 죽자 마치 사회장(社會葬)을 치르는 것처럼 법석거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초상집에 모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눅8:52) 어째서 소란스럽게 우느냐?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야이로의 딸이 실제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죽음’이 ‘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그들이 직접 목격했듯이 그 소녀는 숨이 끊어졌지만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죽음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울던 사람들, 이미 외동딸이 죽은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막5:41에서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 아이가 곧 일어나 걷게 되자 비웃었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일어나 걸었다는 것은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살아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비웃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곳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만큼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원문의 뜻으로 보면, 황홀지경에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녀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살아나라’고 하시지 않고,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리고 나사로 집에 가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께 “(요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면서 예수께서 일찍 오시지 아니하신 것을 아쉬워하자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요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요11:27)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 무덤을 찾아가셔서 마치 무덤에서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듯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요 11:39-44)

 이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 잠에서 일어나듯이 거뜬히 일어서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예수께서 “믿기만 하라.”(Don't be afraid. Just Believe!) 고 말씀하신 것은 ‘오직 믿음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뉴욕의 유명한 설교가인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계속적인 걱정은 설교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 수요예배 설교, 초청 설교 등 무슨 내용을 준비할지 1년 내내 걱정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이때 의사가 목사에게 ‘설교’했습니다.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까?(Don’t focus on your problems but on God)” 

이 의사의 말 “당신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착하시오” 는 나중에 필 목사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나와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들은 채도 안하시자, 제자들이 예수께 ‘저 여자가 소리치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귀찮은데 무슨 말씀을 해서라도 쫓아 버리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마15:24)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으로 냉혹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와서 절하며 다시 한 번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마15:26)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방 여인을 개처럼 취급하시는 굴욕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이렇게 말하며 또 한 번 간구합니다. ‘(마15:27)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인의 이같이 끈질긴 간구에 예수께서 “(마15:28)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온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께만 집중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어떠한 문제라도 예수께서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해도, 어떠한 말과 어떠한 취급을 당해도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믿음으로 예수께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개 취급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굽히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가면 혹시나 귀신들린 딸이 고침받을 수도 있다는 복불복(福不福)의 심산이 아니라, 오직 희망은 예수밖에 없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같이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하는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어두운 말을 들어도, 어떠한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어두워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팔복에 한 개의 축복을 더 약속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29입니다.
(요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과 ‘축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축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믿음을 가지면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행복한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나를 위한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2천년 전,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B.C. 870년경,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수 년 동안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아니하는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누구나 할 것 없이 기근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시돈 근처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러 있거라. 내가 그 곳에 사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도록 하였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그곳에 이르자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를 불러 물 한 컵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과부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빵도 한 조각 갖다 주시오.’ 하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내게는 빵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 뿐입니다. 이것으로 내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만 먹고 나면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가서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시오. 

그런 다음 남은 것으로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 당신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엘리야와 그 식구들이 여러 날 동안 먹었는데도, 말씀하신 대로 그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그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여기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아무리 기근이 심할지라도 통에 양식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에 마르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왕상17:8-16) 

믿음은 2,870년 전, ‘사르밧 과부에게 일어난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과부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시며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마르지 아니하며, 소원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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