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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삼하 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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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사무엘하 1:17-27)


오늘 본문은 다윗이 지은 유명한 애가입니다.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애증이 뒤섞인 복잡한 관계였습니다.처음에는 골리앗을 이기고 나라를 구한 애국 소년으로 칭찬했다가 나중에는 지독한 질투심이 발동하여 다윗의 목숨을 노렸던 사울입니다. 사울은 나이로 봐도 다윗보다 아버지 연세였고, 딸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보내 미우나 고우나 장인과 사위 관계였습니다.다윗이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와 사울의 왕국을 강하게 세워주었고 왕권을 든든하게 보필했건만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리고 악신이 들린 사울은 병적인 질투와 의심으로 다윗을 여러차례 죽이려 했던 비정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면서도 사울을 불쌍히 여기고 억울한 심정을 오직 하나님께 토하며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을 믿고 참고 견뎠습니다.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들으면 다윗이 누구보다 좋아할 줄 알고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증거물로 가져왔던 아말렉 소년은 부상당한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거짓 보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하였습니다.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들은 다윗은 옷을 찢으며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였습니다.아말렉 소년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인 죄로 사형을 당하였고 다윗은 오늘 읽은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그의 노래 속에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는 구절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다윗은 요나단을 자기 형처럼 끔찍하게 사랑하였으니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그러나 사울은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지긋지긋한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존하였을 때 이스라엘 나라를 위하여 세운 업적을 칭송하여 높이며 독수리와 사자보다 강한 용사의 죽음으로 미화시켰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으니 주께서 갚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롬12:19, 히10:30).  나를 괴롭히고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원수갚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자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도 이런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웃나라 일본과 한국의 긴 역사 속에 뿌리 박힌 미움과 상처는 어느 때에나 해결이 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를 그렇게 못살게 하였고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았던 원수관계가 어느날 갑자기 친구로 회복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고약한 이웃을 주셨는가?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우리가 일본과 일본 사람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은 왜놈, 쪽발이, 게다짝이었고 잘해야 일본놈이었습니다.물론 일본도 우리를 부를 때 지금도 조센징이라고 비하합니다.세월이 흘렀고 또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서로간의 감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지만 일본을 향한 우리의 감정과 그들을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곱지 않습니다.이번 지진 사건으로 우리나라 여러 단체에서 일본 이재민을 위해 물질적 혹은 인력 후원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물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제일 먼저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좋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후원사업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의 여론은 찬반으로 갈라져 있습니다.도움을 받는 쪽 입장에서도 경제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선한 마음으로 도우려는 사람 심기를 건드리는 무례한 말들도 들려옵니다.거기다 엊그제 신문에는 일본이 내년도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넣겠다고 우리나라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통보해왔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그 기사를 읽고 속이 상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댓글을 올린 내용을 보면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유출로 국가 위기를 만난 일본을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는 가깝고지만 감정적으로는 정말 멀고도 먼 나라이며 정말 어려운 관계입니다. 일본 국민들 중에도 이번 지진과 쓰나미는 천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일본 국민은 절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그런데 이웃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반일감정을 가지고 별별 소리를 다하며 일본이 당연히 당할 재앙을 만났다  여기고 고소해하면서 상처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지난 번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건 때처럼 일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진이 일어났다는 발언을 하여 수군덕거리는 중입니다.기독교계에서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기독교 세력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한국 기독교 지도자가 튀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사방에서 벌떼처럼 달려들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재난을 만난 이웃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기며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려해도 음흉한 일본의 속셈을 모르고 착한 척하는 배알이 없는 사람들이라 비판하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회개의 기회 운운하면 또 쌍심지를 켜고 달라들며 자기들만 의로운 척하는 위선자 개독교라고 발끈합니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을 먹는 때에 너도나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말조심 행동조심하며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처신해야 합니다.우리가 성경일독을 하며 지난 두 주간 사무엘상하를 읽고 있는데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가 주로 많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따르는 우리 교우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들이 생길 때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옳을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법칙이나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일본이 만난 재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은근히 통쾌하게 여기는 것이 일본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애국자의 마음일까요? 아니면 지진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 재해니까 재난을 만난 사람들은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며 이런 일에 하나님의 섭리나 심판 등 종교적인 해석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이 과학만능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쿨한 자세일까요?그렇지 않다면 자의식으로 충만하여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며 일본이 당할 벌을 받은 것이니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더 큰 벌도 받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여 아픈데를 한 번 더 후벼파는 잔인함을 보여야 선지자적이고 거룩한 믿음일까요?

이번 지진 사건 이후 영국인들은 일본을 걱정하는 마음에 동양 사람을 보면 혹시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괜찮으냐고 묻습니다.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여러번 받았을 것입니다.이스라엘 성지순례 다녀오느라 몇 일 안보였다가 나타났더니 이웃집 부부가 혹시 지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아니었느냐고 걱정을 해주었습니다.또 다른 옆집 할머니도 걱정하시며 이 다음에 집을 오래 비울 때 미리 말해주면 그동안 누가 우리집을 오가는지 잘 살펴주겠다는 친절도 보이십니다.남의 일이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국 선교사님들의 기도편지를 읽어보면 재난의 현장에서 경험했던 그날의 위험한 순간들이 실감나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 남아 고난당하는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굳는 의지를 보이며 일본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영적각성과 하나님께 돌아옴을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요청을 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 어찌 가능할까요? 

이번에 이스라엘을 여행하던 중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을 보았습니다.나치 전범들이 얼마나 극악한 방식으로 유태인들을 학대하였는지 가슴이 먹먹하고 소름이 끼쳤습니다.물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얽힌 거짓 신화와 상업적 음모 등 부정적인 이야기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사람들에 대한 비윤리적인 탄압행위 등을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어쨌든 이스라엘은 그 슬프고 고통스런 유물들을 자국민들과 그곳을 방문하는 전세계 사람에게 보여주며 독일 나치들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합니다.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똑똑히 보고 듣게 함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무장하고 또 무장하는 교육을 반복하고 있습니다.불행한 과거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무서운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그 끔찍한 고통의 순간에 자신들을 도운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 놓고 감사함을 잊지 않는 기념물도 전시해 놓았습니다.  유명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여러분들도 보았을 것입니다.그날 박물관을 견학하며 거기에 기록된 고마운 사람들 명단 중에 그 영화의 주인공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이름도 보았습니다. 원한을 품고 마음에 복수의 칼을 품고 있다면 동의할 수 없지만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그들의 자세는 우리가 꼭 본 받을 일입니다. 
  
이웃이 당한 불의의 사고나 죽음을 두고 박수치며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질병이나 사고, 자연재해나 전쟁 등 그 어떤 이유로 당한 죽음일지라도 그 죽음을 함부로 평가하고 조롱거리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읍을 멸망시키겠다는 정보를 요나 선지자에게 먼저 알리셨습니다.그리고 그 성으로 가서 니느웨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외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심히 싫었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붙잡아들여 기여코 니느웨 성에 들어가 회개의 멧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억지로 끌려가 메시지를 전한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성읍의 온 백성이 회개하고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엎드렸습니다.이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려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명을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금식하고 물도 입에 대지 말라 하였으며 모든 사람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했습니다.우리가 모두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진노를 그치사 우리를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느냐 했습니다.

니느웨에 대각성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이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고 싫어하여 하나님께 대들며 기도했습니까?‘차라리 내 생명을 가져가십시오.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며 하나님이 니느웨에 베푸신 은혜를 싫어하였습니다.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넝쿨 하나를 준비하여 그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주시니 요나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있는 것보다 시원한 그늘이 얼마나 좋은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벌레 하나를 준비하여 이튿날 새벽에 그 방넝쿨을 씹게 하시니 박넝쿨이 금방 시들어버렸습니다.거기다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하여 요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쓰러질 지경이 되었습니다.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대들며 기도하기를 ‘내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십니다.‘네가 이 박넝쿨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고집불통 요나가 대답합니다.  ‘내가 성을 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가꾸고 기르지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다면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명이나 있고 가축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물으셨습니다.여기에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진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 이웃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앙과 죽음을 즐기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에스겔 33장1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게도 공평하게 주시는 구원의 멧시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바로 이 구원을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우리에게까지 선물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내가 구원을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성령 하나님의 회개케 하심과 감동케 하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맙시다.우리는 고난 당하는 이웃을 보며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통하여 나의 현실을 돌아보고 나도 그들처럼 어려움에 처하지 않음을 감사하고 지금 고난 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랑의 손길을 펼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래 쌓여온 정치적인 악감정으로 우리와 불편한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북한 사람들이든 우리와 직접 상관이 없는 미얀마와 아이티와 인도네시아, 리비아와 아프칸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극한 재난과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니느웨 성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날도 고난 당하는 백성들 가운데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일본의 피해지역에는 최대 7만5천명의 아동들이 집을 떠나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중이며 아동들이 목격한 끔찍한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겁에 질려 있고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대지진으로 일본은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일본이 이재민을 구제할 돈이 없거나 남들보다 과학기술이 떨어져 자국민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경제대국 일본, 하나님 없이도 우리끼리 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일본은 스스로 높이 쌓아놓은 자만심으로 이웃의 도움을 사양하고 있으며, 재난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관료들의 굳어진 사고방식 등이 재난 복구를 더디게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원전 방사능 유출을 해결하지 못한 지금 당사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지만 주변 국가들과 세계 국가들도 염려하고 있으니 국가적 자존심과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어 이래저래 속이 상한 일본입니다.  

이런 엄청난 재난 중에 아직도 자존심과 거만함에 사로잡혀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비참함을 속히 깨닫고 좀더 정직하고 솔직한 태도로 거듭나는 민족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어쩌면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교만하고 고집불통이며 누구의 조언도 거절하고 전혀 변화될 마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합시다.더 무서운 재앙과 인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의 행복과 위로와 성공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그들과 다릅니다.도무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입니다.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눔으로 그 사랑은 더욱 능력을 나타냅니다.  

끝으로, 이번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우리 역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끝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4-5) 사고와 재난을 만나 죽고 다친 사람들은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응당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모두가 죄인이지만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불러가실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비하여 날마다 준비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일본 뿐 아니라, 중국, 미얀마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크게 임하길 기도합시다.전쟁과 테러와 종족간 분쟁으로 지금도 수많은 생명들이 죽고 부상을 입어 불구자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며 회개와 경건의 삶을 힘쓰는 사순절 기간에 슬픔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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