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와서 보라! (요 4:27-30)

첨부 1


와서 보라! (요 4:27-30)


인간 관계에 있어서 만남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만남도 있습니다. 학력 위조와 유부남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물의를 빚고 옥살이를 했던 신정아 씨 같은 사람을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만남은 만남 그 자체로서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 보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인격과 인격이 만날 것 같으면 웬만한 오해는 풀리게 됩니다. 또한 의심도 사라지게 됩니다. 만남을 통해서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리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려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행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했는데 거기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때는 정오쯤 되었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물 곁에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그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퉁명스럽게 유대인이 어째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질문과는 좀 거리가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문제를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는 단순히 마실 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갑자기 화제를 바꿔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 때 예수님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죄의식 같은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병든 자를 고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다른 관점에서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잘했다 혹은 잘못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을 뿐입니다. 말씀을 들은 그녀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범상치 않은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그녀로 하여금 놀라운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녀가 비록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아직 믿음의 대상으로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인식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그녀의 문제는 영과 진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어디에서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영적인 갈급함을 육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만족이 없었고 갈수록 더 곤고해졌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밝혔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녀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그 구원이 시직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녀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선포하심과 동시에 메시야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넘어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과 나눈 몇 마디 대화 중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에 남편이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직한 만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솔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이어서 예배할 장소를 찾는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졌습니다. 예배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사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질문은 어떻게 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심각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사죄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기가 만난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감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게 된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물을 길으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물론 다시 돌아올 생각으로 가기는 했겠지만... 하여간 그녀에게 있어서 물동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녀는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자랑하고 싶어서 동네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사람들은 나를 업신여기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녀가 뭐라고 외쳤습니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주위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의미를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동네로 급히 달려갔던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 둔 채로... 마음이 얼마나 급했으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달려갔겠습니까?

가서 그녀가 뭐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와서 보라!”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증언이요 또 고백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녀가 체험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와서 직접 보고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가 직접 체험한 사실을 증언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나왔습니다. 비록 그녀의 과거 행실은 바르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은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나왔다고 성경이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전도하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어느 때보다 교회 안에서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도는커녕 예수 믿는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기조차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위기가 하나님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먼저 구원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에게 문제 해결 방안을 솔직하게 묻고 그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도 그 주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와서 보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