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사셀 혹은 예수 (레 16:20-25)

첨부 1


아사셀 혹은 예수 (레 16:20-25)


[이렇게 하여, 아론은 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성결하게 하는 예식을 마치게 된다. 다음에 아론은 살려 둔 숫염소를 끌고 와서, 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 그런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내야 한다.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아론은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낸다. 그런 다음에, 아론은 회막으로 들어간다. 그 때에, 그는 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은 모시옷을 벗어서 거기 놓아 두고, 성소 안에서 물로 목욕하고 난 다음에, 다시 그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의 번제물과 백성의 번제물을 바쳐,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하여야 한다. 속죄제물로 바친 기름기는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 미안함과 고마움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신앙생활은 옛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몸과 마음에 쌓인 습기(習氣)와 적폐(積弊, 오래 뿌리 박힌 폐단)를 일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종교든 나름의 전례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 리듬을 따라 살 때 우리가 아주 빗나가지 않을 수 있음을 오랜 세월을 통해 터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눠드린 사순절 달력을 잘 이용하고 계시지요?

기독교는 아주 오랫동안 ‘죄’의 문제와 씨름해왔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원죄’입니다. 이 말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인류의 첫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나눠야 하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죄’를 교리로 이해하면 불쾌하지만, 그것을 우리 삶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로 생각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아주 단순하게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곧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손해나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은 미안함입니다. 

무감각한 사람만이 삶이 미안함임을 알지 못합니다. 미안함은 동시에 고마움이기도 합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덕분에’ 삽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부터 먹는 음식 사는 집 누리고 사는 모든 것들이 다른 이들이 만들어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엄마가 왜 우리를 사랑할까요?”라는 질문에 “글쎄 말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초등학생이 오히려 귀엽지 않습니까? 잘 산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번번이 남에게 해를 끼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웃과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그렇기에 죄는 덮어둘 것이 아니라, 청산되어야 합니다. 

• 대속죄일 의례

유대인들은 일 년 중 하루를 자기들의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용서를 청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대속죄일’(Yom Kippur)이 그것입니다. 유대교 달력으로 7월 10일에 거행되는 이 의례는 유대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례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중 단 하루, 바로 이 날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와 자기 집안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의미에서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 후에 제단에 피어 있는 숯을 향로에 가득 담고, 두 손 가득 향가루를 떠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 향가루를 숯에 뿌려 향 타는 연기가 증거궤 위의 덮개를 가리도록 했습니다. 다음은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덮개 주위에 뿌립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이 바친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을 덮개 너머와 덮개 앞에 뿌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를 성결하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백성들이 온갖 죄를 지어 성소마저 부정을 탔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은 회막과 제단까지 성결하게 하는 의식을 집행했습니다.

뭐가 이리도 번거로운가 싶은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조심스런 의례의 집행이 사람들에게 준 교훈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대제사장의 몸짓 하나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함’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지, 그리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함을 잘못 다루었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다른 금지된 불을 담아 향을 피웠다가 죽었습니다(레위기10:1-2).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수레를 몰던 웃사는 하나님의 언약궤에 손을 댔다가 죽었습니다(삼하6:6-7). 웃시야 임금은 분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나환자가 되었습니다(대하26:19).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성찬식을 오용함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고전11:27-30)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지에 대해서는 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른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 그것이 비록 짐승이라 해도 우리 마음이 심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 바라보면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의 신비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의례는 우리를 그런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인인 셈입니다.

정교회나 가톨릭교회의 의례에 참석해보면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제들이 입는 복장, 성만찬을 집전하는 모습, 향을 피워 흔드는 모습 등은 개신교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례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경험합니다. 구경꾼들에게는 낯설지만, 참여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번거롭다고 하여 의례를 버린 것이 개신교회의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 희생 염소

대제사장은 숫염소를 잡아 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정화한 후에, 숫염소 한 마리를 끌어내 그 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는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숫염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염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빈들로 이끌게 합니다. 그 숫염소는 ‘아사셀Azazel’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아사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되는 견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사셀이란 ‘염소’를 뜻하는 ‘에르’와 ‘제거하다, 없애다’를 뜻하는 ‘아젤azel’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죄를 없애는 염소라고 해석합니다. ‘아자즈azaz’가 ‘울퉁불퉁한 지역 혹은 절벽’을 뜻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광야에 있는 어떤 위험한 장소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아사셀 양 희생은 유목민들이 그런 장소를 지날 때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염소를 바치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사셀은 광야에 살고 있다고 믿어지는 악한 영 혹은 악마를 뜻한다고도 말합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숫염소에게 죄를 전가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새해가 시작되거나 새봄을 맞이할 때 우리는 집안 대청소를 하곤 합니다. 새 마음으로 살고 싶은 바람 때문입니다. 가끔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가서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래서 삶이 버겁습니다. 욤 키푸르 의식은 그런 의미에서 삶을 갱신하는 집단적 정화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사셀에게 보내는 숫염소의 머리에 자기들의 죄를 전가함으로써 옛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전례에 동참하는 이들은 묘한 일치감을 맛보았을 겁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내면에 쌓이는 적대감, 분노, 미움을 처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병든 사람이 됩니다. 그런 감정을 해소할 능력이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곤 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그 갈등은 사회적 분쟁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이런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할 장치를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숫염소의 머리에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도 있어야 합니다. 성찰과 통회와 결심, 이것이 바로 욤 키푸르의 세 기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죄를 숫염소에게 전가하고는 가뿐한 마음으로 옛 삶을 계속한다면 그처럼 허무한 일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죄를 전가하는 일이 역사 속에서 오용되는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희생양 만들기’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전염병을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여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곤 했습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나 유대인 박해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불행의 원인을 다른 누군가에게 찾는 일에 익숙합니다. 대개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을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 영문 밖으로

사람들은 아사셀에게 바쳐진 숫염소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는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1:29) 하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지워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쫓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톨이가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스스로 더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사람들을 덥석 안아준 것이 죄라면 예수님은 과연 큰 죄인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실체가 폭로되고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공모하여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폭력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세상의 모든 모순과 폭력과 부정성을 짊어지심으로 그런 폭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폭력은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심으로 폭력의 고리를 사랑으로 끊으셨습니다. 죽음조차도 증오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예수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울먹이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고백 이후에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죄나 허물이나 모순을 전가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짊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 후에 즉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히12:13)

지난 번 해운대 교회에 갔을 때 담임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참 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로드 킬(road kill)을 당한 동물의 사체를 보면 반드시 차를 멈추게 한 후에 그 사체를 정성껏 치워주곤 한답니다. 대개는 눈길을 돌리기 마련인데, 참 특별한 학생입니다. 길에서 더러운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합니다. 길을 더럽힌 사람을 욕하는 이들도 있고, 모른 체 지나치는 사람도 있고, 신문으로 덮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치우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하고 탓하고 외면하기는 쉽습니다. 반면 치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외로우십니다. 동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많은 데, 당신의 일을 함께 하려는 일이 적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1:24)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게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한번 그 문지방을 넘어서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않았던 기쁨이 우리 삶에 유입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그 길을 걸을 때라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사순절 순례 길을 걷고 계신 교우 여러분, 누군가를 탓하고 욕하는 버릇을 버리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픔을 스스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녹여내는 영적인 장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