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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 (신 24:18-22, 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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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 (신 24:18-22, 약 1:26-27) 


“신24: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미 지나갔지만 2월14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바로 “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s Day)”였습니다. 그런데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를 알고 계십니까? 

“발렌타인데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로마시대 때 로마교회의 성 ‘밸런티누스’ 주교가 군인들의 군기문란을 우려하여 남자들을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명령을 어기고, 신부가 남녀를 몰래 결혼시키다가 걸려서 사형을 당했는데 밸런티누스 신부가 사형을 당한 날이 바로 2월14일이라고 합니다. 즉, 군인들의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인 2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한 축일이라는 주장과, 

서양에서는 전설상의 순교자 성 발렌티누스가 순교한 날이자 겨울잠에서 깨어난 새의 암. 수컷이 서로 짝짓기 하는 날이 2월 14일이라고 믿은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14세기부터 연인들의 축제일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로 자리매김하면서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선물과 카드를 주었으나 선물로는 지금은 초콜릿을 선물을 주는 날로 인식되어 초콜릿이 많이 이용되는데 이것은 18세기 엽색가 카사노바가 사랑을 유발시키는 미약으로 초콜릿을 선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밸런타인데이를 하루 앞둔 2월13일에 서울 중구 명동 한복판인 우리은행 앞에서 특별한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가수 중에 ‘기부천사’로 잘 알려진 김장훈씨가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는데, 이날 이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단어를 가진 “볼런티어 데이(Volunteer Day)”를 선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볼런티어’는 자원봉사자를 말합니다. 이 행사는 ‘한국대학생 리더십 센터 자원봉사 원정대’에서 ‘기부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발렌타인데이”로서 초콜릿 소비촉진을 위한 날이 아니라 섬김의 날, 봉사의 날로서 “볼런티어 데이”로 거듭나기를 소망해봅니다. 

또한 화이트데이(White Day)는 대한민국, 일본, 타이완에서 3월 14일에 지내는 일종의 기념일입니다. 발렌타인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한 달 뒤인 화이트데이에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알려 졌습니다.

화이트데이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1965년 일본의 ‘마시멜로’ 제조업자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때는 ‘마시멜로데이’로 불리다가 나중에 화이트데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초콜릿 제조업체도 화이트 초콜릿을 판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남자가 마시멜로, 화이트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로 주는 날이 되었습니다. 즉, 받은 선물에 대한 반응, 감사로 화답을 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보혈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바 은혜를 보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말세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지만 천국에 소속된 천국시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생이 있는 하늘나라에, 소속적으로 천국에 속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삶의 목표와 추구하는 모든 삶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함. 즉, 구별됨, 경건성이 가미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리 세속화된 세상에 살지만 그래서 구별된 경건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경건한 삶을 위해 예배를 잘 드려야 하고,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해야 하며, 기도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또한 지난 주일에는 교구헌신예배를 드리면서 경건한 삶에서 말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하며, 전도의 사명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도 대상자 작정서를 나누어 드린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이 전도 대상자를 전도하는 귀한 기간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오늘은 참된 경건의 삶,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본문 약1: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물리지 않으면 헛된 경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에 많이 참여한다 할지라도 혀를 다스려 말을 삼가하지 않으면 헛된 경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혀를 다스리고, 말을 삼가야 합니다. 심지어 말을 삼가기 위해서는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오늘날 기계적인 용어로 하면 ‘혀에 브레이크를 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타는 말이나 소를 부릴 때에 입에 망을 씌우거나 무엇을 물리면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어서 일을 잘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먹이가 보이면 그 입으로 먹이를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을 잘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어 보면 입이 가벼운 사람이 이쓴데 사귀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은혜도 쉽게 받고, 무슨 일이든지 일은 잘 하는데 후에 말로서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느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결혼 5년 만에 외식을 하자며 나갔습니다. 아내는 부푼 기대를 갖고 길을 나서서 오랜만에 남편의 팔짱도 끼어보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풀쩍 풀쩍 뛰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남편이 명동에 가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서 맛있는 차를 한잔 할 것인가? 아니면 백화점에 들어가서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한번 골라봐’라고 할까라고 상상하는 등 김치 국물부터 마시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아이를 키운다고 외식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데 오늘 점심은 모처럼 칼을 들고 비프스틱을 잘라 볼 것인가! 아주 꿈이 많은 소녀처럼 외출을 나가서 데이트를 하는데 얼마나 갔을까? 남편이 갑자기 팔짱을 낀 아내의 손을 뿌리치더니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집에서 나올 때 가스 밸브 잠그고 나온 거야?” 그 다음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말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말을 함부로 하게 되고 결국 말에 따른 행동이 따르지 못함으로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이러 습관이 반복되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한다 할지라도 그 경건은 헛된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경건한 삶이 거짓되지 않고 위선되지 않으려고 한다면 몇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도서 5장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헛된 경건의 삶이 되지 않고 참된 경건한 사람이 위해서는 우선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고 행하라고 권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누구 앞에 있느냐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어른 앞에서 노는 것 하고 자기들끼리 노는 것은 행동과 말이 다릅니다. 자기들끼리 놀면 아무 말이나 행동을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버릇없는 행동이나 마이 나옵니다. 

반면에 부모님 앞이나 어른들 앞에서 놀고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말을 해도 조심스럽게 하기 때문에 막말을 하거나 상스러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항상 ‘치놀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이가 좀 든 사람들 하고 놀아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화가 교회에서는 맞지 않지만 그러나 태도 때문에 마지  못해서 비유한다면 ‘술을 배울 때 동생들과 배웠느냐, 아니면 어른들이나 형님들 앞에서 배웠느냐에 따라 술 마시는 태도나 술이 취한 후의 행동이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앞이 아닌 줄을 착각하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아무렇게나 행동과 말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불경건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우리가 경건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버릇없는 삶이 아니라 거룩하고 성결한 삶이 됩니다. 신명기 18:13절에서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산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해야 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26:6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인데 감히 우리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안다면 속일 수도 없습니다. 진솔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렇게 말을 하고 아무렇게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백부장이었던 고넬료’가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그리고 많은 백성을 구제하는 삶’을 살았는데 한번은 환상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해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모시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 집에 도착했을 때 고낼료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고백한 내용 중에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하였는데 무슨 말씀인가요? 무슨 의미인가요?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고넬료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이 행동과 실천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더라도 심판을 받게 되므로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이 되려고 하면 말도 조심해야 하지만 경건한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참된 경건의 삶, 즉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삶은? 


2. 약한 자를 잘 돌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우선은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지적하신 약한 자, 어려운 이웃은 대표적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 내용의 말씀은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신명기24장 18-22절에 보면 ‘밭에서 곡식을 추수할 때에 그만 잊어버리고 어느 한쪽에 추수하지 않은 곳이 있거나 아니면 베어 놓고 가져오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남은 것으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갖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감람나무를 떤 후에 아직도 꼭대기에 남아 있거나,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이 있으면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22절에서는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그러므로 행할 것을 명령한다고 했습니다. 명령은 복종밖에 없습니다. 권면이 아닙니다. 권유가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바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외쳐 부르짖고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참된 경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참된 경건의 삶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한 나의 일부를 떼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주셔서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야고보2:14-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면 참된 경건의 삶인 나눔의 삶을 제사로 보았습니다. 예배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3:16절 말씀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전국 교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사회봉사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주일을 만들어 지킵니까? 섬김과 봉사가 근본이지만 그것이 실천적으로 잘 안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정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가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것은 로마제국 때였습니다. 로마의 기독교 탄압과 박해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잔혹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 선교 이후 기독교인은 천한 쓰레기, 무법자, 범죄자로 몰리며 로마인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같은 황제들은 자신들의 정책 실패나 국가 재난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법률가 ‘테르툴리아누스’는 “테베강이 범람하거나 나일강에 가뭄이 들어 들판에 물을 공급하지 못하게 될 때, 지진이 나거나 기근으로 전염병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라!’는 외침이 로마 곳곳에서 들려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역사학자 ‘폴 존슨’에 따르면 박해가 정점에 달한 것은 ‘데키우스 황제’ 시절입니다. 그는 250년경 기독교 말살 정책을 세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기적으로 색출 당했고 다수가 순교했습니다. 기독교인 중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참수형을 받았고, 나머지는 원형경기장으로 보내져 맹수들의 밥이 됐습니다. 참수된 기독교인의 머리와 몸은 며칠간 광장에 내걸린 뒤 불태워졌습니다. 탄압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야 종식됩니다. 

하지만 장기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놀랍게도 증가했습니다. 박해가 끝날 무렵 일반인은 물론 로마 군인 상당수도 기독교인이 돼 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선한 행실에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실한 삶의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늘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며 특히 자선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적어 후세에 남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그들은 원할 때마다 그리고 할 수 있을 때마다 동전을 가져왔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모인 돈은 축제나 파티가 아니라 빈곤층에 음식을 제공하거나 그들의 장례비로 사용됐다. 고아와 나이 많은 노예들, 파산한 선원들, 산 섬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 낸 돈의 수혜자였다.” 

그러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박애주의가 로마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엔 복지 제도가 전무(全無)해 많은 빈곤층이 있었습니다. 국가마저 방치한 이들을 돕는 기독교인들의 광범위한 자선 활동은 로마 사회에 신선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가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 같은 역사는 오늘 한국 교회와 기독인들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시해 줍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전래(傳來) 이래 이 땅의 근대화에 찬란한 기여를 해왔습니다. 정치 교육 문화 여성 인권 의료 복지 등 기독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는 따뜻한 눈길 대신 냉담한 시선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올 겨울에 발병한 구제역은 재앙입니다. 이 재앙이 왜 왔는지를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성장은 이뤘지만 사회와의 교감은 부족하다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속으로 좀 더 깊고 힘 있게 파고들어야 할 때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보다 더 많이 사회를 향하여, 즉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내가 누릴 것 다 누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한 삶은 어렵습니다. 우리도 밭이나 과일 나무에서 얼마를 남겨 두었듯이 우리의 소유의 일부, 아니 소득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을 동반할 때에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경건의 삶이 될 것입니다. 

<2008년 미국의 타임지>에 미국의 남자 테니스 챔피언 ‘앤디 로딕’이 전 챔피언인 ‘안드레 에거시’에 대해 쓴 글이 실렸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로딕’이 17세 때에 안드레 ‘에거시’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앤디 로딕’은 대선수와 함께 있다는 것에 매우 떨렸지만 ‘안드레’는 친절하게 하면서 물어볼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앤디 로딕’은 ‘안드레’에게 “가장 큰 후회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로딕’은 그들의 전문분야인 테니스에 관련된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 에거시’는 ‘좀 더 일찍 자선단체를 시작하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1994년에 어린이를 위한 자선재단을 설립한  ‘안드레’는 자신의 프로 테니스 생활은 어린이들의 생활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징검다리였다’고 말했습니다. ‘안드레’는 ‘나는 큰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고 말하면서 레크리에이션과 교육 프로그램 지원을 통해 위험에 처한 아이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헌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지난 3월 9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13일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의 길에 참여하려는 마음으로 경건의 삶을 훈련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의 희생을 통한 섬김과 봉사가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합시다. “경건과 섬김은 동전 양면이요, 자동차의 두 바퀴요, 쌍둥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은 이웃의 고통을 보게 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은 약자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선택했던 긍휼을 베풀어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신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이었던 나를 감싸주고 용서해 주고 자녀로 삼아주셨던 주님의 마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고결한 생명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주님의 심장을 갖지 않고서 어찌 우리가 밭모퉁이에, 감람나무가지에, 포도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보고 따지 않고 그것을 장차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씨 부부의 아름다운 기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결혼 후 매일 1만원씩 모아 결혼 일주년이 되던 날에 365만원을 노숙인들에게 기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습니다. 첫 동반 광고 수입도 전액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내놓았다고 합니다. 현재 200명의 해외 빈곤 아동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매달 한 어린이당 4만 5,000원씩 보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입양하여 현지에서 살아가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부를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재벌이라 돈이 많아서 그러겠지’하고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 부부는 아직 자기 집도 없고 미래를 위해 적금도 든 게 없다고 합니다. 이들 부부는 “재벌은 재벌이되 마음의 재벌”인 셈입니다. 

반칠환 시인의 2003년도에 쓴 시집《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 “하늘을 가진 손”이란 제목 의 시가 있습니다.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 덜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세상에는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얻은 것 같은데 잃고, 잃었는데 얻게 되는 신비한 이치가 존재합니다. ‘하늘을 가진 손은 움켜쥔 손이 아니라 활짝 펼쳐진 빈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는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는가를 말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베푼 사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나의 모든 섬김과 봉사의 삶을, 아주 작다고 생각되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머리털 하나도 세신바 되고, 우리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 한 마디도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가복음6:38절 말씀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 모두 섬기며 삽시다. 쓰다 남은 것이 아닌 처음부터 아예 떼어냅시다. 십일조 주머니 외에 또 다른 하나의 주머니, 어려운 이웃을 위한 주머니를 갖도록 합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하시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19절 하반 절에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고린도후서 9장6절에 보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고, 

9절 말씀에서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시편37:25-26절 말씀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자손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한 움큼을 쥐고 큰 것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반칠환씨가 지은 ‘하늘을 가진 손(하늘을 움켜진 빈 손)’이라는 시처럼 작은 손을 펴고서 쌀가마를 쥘 수 있는 하늘의 손을 가지고 하늘을 움켜질 수 있는 복 되고 지혜로운 삶고 인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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