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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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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롬 2:1-11)

■ 로마서 2장 1절 ~ 11절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 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병식(病識) 이라는 의학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하는데 어떤 환자들은 이 병식이 없습니다. 자신이 이러이러한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치료가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이런 병식이 없는 환자를 주변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깁니다. 아니 비웃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까요? 

‘가운을 벗자’(임재준, 일조각출판사)란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습니다. 최고로 똑똑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닥터(doctor)들도 심각한 착각 속에서 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의학적 판단이 언제나 정확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동료, 자신의 수술솜씨가 대한민국 최고라는 동료들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과연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의학적이다.” 한마디로 ‘가운을 벗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도 이처럼 허점투성인 인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과연 정확할까요? 여기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이 편지의 수신자 로마교회 성도들입니다. 저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여 열매가 없었습니다(롬 1:13). 그리고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진노를 곡해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옳고 그름, 즉 사리판단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문제에 국한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판단이란 단어는 ‘언도하다. 결정하다. 복수하다. 정죄하다. 선고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법정용어입니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자신이 재판장, 아니 하나님이라도 되는 냥, 결정적인 선고를 내리듯 하는 그런 판단을 뜻합니다. 

그러면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이 어떠했단 말입니까? 로마서 1장 24절부터 31절까지 저들의 죄상이 낱낱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이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의 행동조차도 옳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1:32). 이런 이들이 지금 과연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때문에 바울은 매우 섬뜩한 어조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 위에 장차 나타날 일들을 다섯 가지로 열거합니다. 

첫째, 남은 판단하는 것은 네가 너를 정죄하는 것이다(롬 2:1). 둘째,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나타난다(롬 2:2,3). 셋째,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다(롬 2:4). 넷째,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머리위에 쌓은 것이다(롬 2:5). 다섯째,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다(롬 2:9).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의 죄와 믿지 않는 사람의 죄를 어떻게 취급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가볍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에게 관대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어도, 제멋대로 행동해도, 정욕대로 살아도, 그냥 덮어두시고, 기다려주시고,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롬 2:9). 여기 ‘먼저는’이란 말은 ‘첫째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더 엄격히 다루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알면서,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롬 1:21,32).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음을 알면서도, 그 어떤 가책도 없이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판단’과 관련하여 놓치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죄악과 약점을 숨기기 위해 시선과 관심을 타인에게로 돌려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고도의 지능적인 전략이 그 속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객관적이고,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관심 있는 부분에만 주의를 집중합니다. 그러기에 나머지 다른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맙니다.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역이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관심에 관심을 갖게 하여,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지능적인 수법이 ‘판단’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전략과 같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죄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기기 위해 ‘판단’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약점을 들추어냄으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감추어보려는 고도의 계략이 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저들이 남을 판단하는 문제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도덕적 타락, 물량주의, 세속주의가 쓰나미처럼 몰려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안티기독교가 공격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단이 활개를 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적(數的) 감소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마땅히 판단, 비난, 비판할 일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정죄할 것입니까? 그러면서 절망할 것입니까? 살 길은 무엇일까요?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내가 죄인임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교회의 진짜 위기는 ‘내가 죄인이다’는 죄인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일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나아가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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