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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나는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있는가? (마 1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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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있는가? (마 16:13-28)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예수님을 단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와 같은 분으로 알고 있었지, 메시야로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님을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합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과 구세주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을 뿐 아니라, 무저항주의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간디는 예수님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의 무저항주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간디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종교적 또는 도적적인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실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다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며, 우리 자신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형벌을 당할 운명에 놓인 자기의 실상을 아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알게 되어야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올바로 믿지 못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사가 그에게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니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해도 “아니오. 내가 암에 걸리다니, 그럴 리 없어요!” 그렇게 부인하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겸손히 진단 결과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이 살 수 있는 길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처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리신 처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다른 이를 믿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사의 처방에 따르지 않고 “왜, 내가 그런 처방을 따라야 합니까?” 라고 항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의사가 무어라고 할까요?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돌아가십시오. 나는 당신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 이유는,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선언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했습니다.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둘을 화해시켜 주는 분을 말합니다. 죄인은 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만나 뵙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중보자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시며 중보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을 유일하신 중보자로 인정한 것이므로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신앙을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부와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 복 있는 것이 아니고,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게 된 것은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이 사실을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타종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철학적인 진리나 종교적인 진리, 또 과학적인 진리 등을 탐구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나 경험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초월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학문에 해박한 석학들이라도 기독교의 진리에 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란 공직에 있는 관리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72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종교법정인 산헤드린의 의원을 말합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구약 성경에 대하여 박식한 사람으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자,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늙으면 어찌 다시 날 수 있단 말입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요 훌륭한 랍비였지만 거듭남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한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다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입어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시몬 베드로 뿐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른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시몬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그 신앙 위에 세워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 위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 이르기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혹 보면,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내가 교회를 세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나 성경적으로 볼 때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는 개척에 참여한 신자들이 “우리가 교회를 세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늘 기도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 곧 지옥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마귀가 도전할지라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감히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열쇠는 힘 또는 권세를 상징합니다. 집안의 곳간 열쇠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고 주인이 갖거나 충성스런 청지기에게 맡겨서 관리하게 합니다. 또한 열쇠는 잠그고 여는 일을 합니다. 달리 말하면 ‘매고 푸는 일’을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 열쇠를 사용하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천국 열쇠를 사용하는 예가 됩니다. 또한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서 이 특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한즉 하늘이 닫혀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그가 기도한즉 하늘이 열려서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주님께서 주신 천국 열쇠를 잘 활용해서 맬 것은 매고 풀 것은 푸는 권세 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행동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로지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건져낼 메시야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을 때, 무리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시고는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와 같은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는 메시야이신 사실을 공개하지 말하고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때로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이 죽임 당하실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예수님께 일어나다니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과 말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방금 전에 주님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는 십자가 죽음을 만류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것이 곧 사단의 짓입니다. 우리도 때로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마귀의 도구 노릇을 할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때도 있고, 믿음의 형제를 위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시험에 들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함정에 빠진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알면서도 주님께서 그 흉악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 하시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사랑과 의리였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좋은 생각이 주님의 일에는 좋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일을 거울삼아서 언제나 겸손히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살펴서 주의 일에 방해꾼 노릇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를 믿고 따르기 위한 세 가지의 원칙을 우리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첫째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택하지 않으시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욕구를 죽이고, 나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욕망대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욕구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르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을 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기를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부인하시고 곧 이어 기도하시기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우리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성도 각자가 감수해야 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가 질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지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 환난, 어려움 따위를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반드시 져야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혼자 담당하셨지만, 우리 각 사람이 져야하는 자기 십자가는 남에게 대신 져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헌신, 봉사하다 보면 때로 오해도 받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봉사하지 않으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지만 봉사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가리켜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일로 핍박을 당하면 곧장 주님을 버리고 뒤로 물러갑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예비 되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믿고 따르기 위해 언제나 자기 십자가를 달게 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까닭은 주님을 올바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느라고 힘들 때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무죄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가시 면류관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을 생각할 때, 또한 악한 자들로부터 침 뱉음과 조소와 모욕을 당하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주님을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아껴야 보존될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오히려 잃게 되고,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오히려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 당국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면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해서 목숨을 건진 것은 참된 의미에서 생명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의 지상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영원한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일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언급된 “목숨”이란 곧 “영혼”을 가리킵니다. 한 영혼의 가치가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쾌락 따위를 자기 영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영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영혼이라도 사단에게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가치를 올바로 알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기꺼이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장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터인데,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언젠가 이 땅에 살면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가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을 거두었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잃어버린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도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니 가장 지혜롭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날 받을 심판을 생각하면서 충성되이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한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마다 주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예수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을 지키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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