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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려두신 사람들 (롬 1: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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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어도 야단치지 않고 징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인가, 잘못할 때마다 야단치고 매를 드는 것이 사랑인가?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으면 매를 들어 징계하는 것이 더 큰 벌인가 계속 죄를 짓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더 큰 벌인가? 죄를 지어도 벌이 내리지 않으면 계속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인가?

전도서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즉시 벌하시지 않는가? 죄를 지어도 즉시 벌하시지 않는 것은 계속 죄를 지어도 된다는 하나님의 허락인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의 경우를 보자.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가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나누어달라고 요구한다.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해도 계속 조르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재산을 나누어준다. 작은 아들은 즉시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갔지만 곧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은 거지꼴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날 때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알았고 그러기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주고 보내준 것이 사랑인가 징계인가? 아들은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사실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고 복이 아니라 화였다. 아버지는 아무리 말려도 아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네 맘대로 해보라고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심판이고 진노이다. 하나님은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렇게 죄를 짓고 살도록 내버려두신다. 그렇게 죄를 짓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도록 버려두시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증거이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다면 슬퍼하라. 범죄할 때에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라.

16,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구든지 복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전의 양면처럼 똑같은 하나님의 속성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역시 함께 있는 것이다. 즉 구원의 하나님은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만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보고 또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느 누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래서 17절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했고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씀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인을 벌하시고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나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된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처럼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에 그 사랑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진노가 있기에 용서를 믿을 수가 있고, 징계가 있기에 축복의 약속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Meyer는 “하나님의 진노란 악에 대해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분의 사랑과 선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경건하고 의로운 자도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했다. 죄에 대해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사랑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반응이고 사랑도 선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왜 복음이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여기에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죄를 씻어내고 죄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의미를 알고 구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1:18-3:20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밝힌다.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인간의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먼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진리를 막고 죄를 짓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첫 번째 대상으로 적극적인 죄를 말한다. 진리는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이 복음은 항상 널리 전해지고 계속 퍼져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악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침해가 되고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멀리서 죄를 짓고 있는 것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고 복음의 역사를 방해할 때 하나님은 가차 없이 즉시 진노하신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알고 짓는 죄에 대하여 나타난다. 19,20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같은 죄라도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알고도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는 다른 것이다. 무식하면 가르치면 되고 졸고 있는 사람은 깨우면 되고 모르는 사람은 알게 하면 되지만, 알고도 지은 죄에 대해서는 심판과 진노 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전도는 진리를 모르는 자에게 진리를 전해서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릇된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이다.

19절에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에게 있다”고 하였다. 사람이 타락해서 우상을 섬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 바로 알 수는 없어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성품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19절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한다. 아무리 사람이 핑계해도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계시해 주셨고, 또 그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하나님의 형상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니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에 빠져 헛된 것을 섬기고 있다 해도 이미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렇게 알고도 짓는 죄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로,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21절) 먼저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성향을 띠고 있다. 소위 많이 배워서 많이 안다는 지식인들이 그렇다. 만약에 하나님이 있으면 사람은 걸리는 게 많고 부담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해놓고서 그런 대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고 판단 받지 않기 위해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무신론이란 말이 있지만 정확히 말해서 무신론은 없다. 불신론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아버지가 없다고 하는 나쁜 자식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내가 괴로우니까 억지로 부정하는 여기에 큰 죄악이 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감사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불신앙적 자기교만 때문에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아니면 결코 살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재주가 있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또는 운이 좋아서 팔자를 잘 타고나서 잘 살고 잘 먹고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숨을 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자기 지혜로 살고 자기 능력으로 산다고 하면서 감사치 않는 것처럼 큰 죄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그처럼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인가? 그것은 “버려두는” 것이다. 24절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26절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28절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그렇게 죄를 짓고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인간이 짓는 죄에 대해서 일일이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죄를 많이 지어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의 최종심판을 받고 멸망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바로 왕이 바로 그런 예이다. 그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계속 당하면서도 자꾸 점점 악해지고 강퍅해졌다. 어떤 사람은 매를 맞거나 고통을 당하면 점점 겸손해지고 선해지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더 악해지고 점점 더 심해지고 회개할 생각은 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이런 사람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어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니까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이때 유다는 주님을 떠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주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이다. 악해진 네 심령이 원하는 대로 가서 죄를 짓고 심판을 받으라고 버리신 것이다. “내버렸다”는 말은 현재적으로 여기서 결정을 짓고 심판을 받고 다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심령들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섬기지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 않게 되면 “그 마음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고 미련하고 우준 해진다.”(22절) 자기는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망하는 길로 스스로 들어간다. 그것이 무엇인가? 곧 우상숭배이다. 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상숭배란 인간이 짓는 죄 가운데 최고의 죄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마음,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는 마음, 인간에 대한 자기교만, 욕심과 정욕이 합쳐서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으며 사는가? 
첫째, 정욕을 따라 더러움에 빠져 살게 된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것은 성적 타락을 가리킨다.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의 정욕을 따라 더러운 삶을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성적 타락에 제일 먼저 빠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성적 타락이다. 성경에도 성적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다. 그래서 영어의 “sodomy” 즉 “소돔 사람 같다”는 말은 남성 동성연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의 봄베이시는 화산이 터져 용암이 흘러 내려서 멸망했는데 발굴된 화석들 중에 많은 경우가 그 당시의 극심했던 성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둘째, 부끄러운 욕심에 빠진다. 26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앞의 경우가 일반적인 타락이라면 이것은 더 저열하고 저급한 타락이다. 단순한 성적 문란 정도가 아니라 동서애에 빠지는 죄를 말한다. 

여기서 남자나 여인은 ‘수컷, 암컷’이란 뜻으로 단지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이만을 표시한다. 성적 타락에 빠지면 마치 짐승들처럼 남자와 여자가 단지 수컷이나 암컷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도가 지나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의 정체성을 벗어나서 동성끼리 탐닉하는 저급하고 부끄러운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욕의 죄의 결과로 몹쓸 병이 돌게 되었다. 27절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성적 타락에 대한 진노가 몸에 임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불치병인 AIDS는 이러한 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셋째,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된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기서 “상실한 마음”이란 ‘타락한 마음’이란 뜻이다. 29절 이하에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이 행하는 도덕적인 타락을 열거한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그 마음이 타락해서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은 이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까지 정당화해준다. 32절 “자기들이 행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기서의 ‘사형’은 자연적 법률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이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벌하시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잘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내 잘못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 죄를 찬동하고 변명한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어떠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큰 축복이다. 죄가 생각나면 그 순간에 즉시 무릎을 꿇고 겸손히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다면 크게 축복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기보다 변명하는 사람은 버려진 심령이다. 징계를 받아도 깨닫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겸손히 엎드려 즉시 회개하고 용서 받으라.

오늘 말씀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28절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죄와 심판에 대한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며 죄를 지으며 살게 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을 알고도 섬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러운 정욕을 따라 살고 부끄러운 일을 하며 살고 죄를 지으며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계속 짓는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떠나고 깨끗해져야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와야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다시 받아주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가 죄를 벗어나서 깨끗해져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더러운 상태로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깨끗하게 해준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 우리 삶에 죄를 없이하기를 힘쓰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달라지고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고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새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우상이 꼭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을 그 자리에 앉혀 놓는 것이 곧 우상숭배이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면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도 감사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그래서 더러운 죄를 지으며 살도록 버려두신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은총과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기 전에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라.

우리도 이 버려두신 상태에 빠지지 않기를 힘써야 한다. 연약해서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라. 

또한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높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우리의 마음을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기를 힘쓰라. 사람의 마음은 언덕 위의 수레 같아서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으면 헛된 우상과 죄에 빠진다.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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