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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모두 하늘입니다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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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3장 53절~58절

설교제목 : “사람은 모두 하늘입니다”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에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후생가외 이야기>

  출퇴근하는 버스에 한 켠에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참 좋은 말이다 싶어서, 그 말의 깊은 의미와 유래를 찾아봤습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뒤에 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후배는 나이가 젊고 의기가 장하므로 학문을 계속 쌓고 덕을 닦으면 그 진보는 선배를 능가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는 말. 자기보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이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온다. “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공자가 말했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 가히 두렵다. 어찌 오는 사람들이 이제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으랴.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으면, 이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될 뿐이다.)”


  여기서 ‘외(畏)’란 좋은 의미에서 존경하고 주목할 만한 것을 말한다. 즉, 뒤에 태어난 사람인 후배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한 말이다. 그들의 장래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알 수 없는 기대가 섞인 두려움인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도 더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사오십이 되도록 이름이 나지 않으면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말함으로써 젊었을 때 학문에 힘쓸 것을 충고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 말을 통해 젊은이는 항상 학문에 정진해야 하고, 선배되는 사람들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겸손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이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에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고향 땅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주변에는 제자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가 다니는 곳에는 많은 병자들과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는데, 고향에서는 달랐습니다. 고향 사람들 어느 누구도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는 고향 땅을 쓸쓸한 마음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 허탈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

  오늘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의 주제는, “다른 사람을 어느 시각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시각은 어떤 것이며, 하느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마음과 자세로 보아야 하는가 … 뭐 그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첫째, 오늘 성경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非) 일상성(日常性)적 신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보낸 예언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예언자는 뭔가 비 일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 하느님의 사람이 있다기보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혹은 뭔가 신비로운 기적적 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자’에 대해 기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는 우리 일상적 생활인들 속에 숨어 있습니다. 아니 많이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루하루 일상적 삶속에서 소소하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곧 ‘하느님의 사명자들’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진리를 분유(分有), 즉 나눠 갖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둘째,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사람들은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훌륭한 사람인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인가’, ‘친구인가, 적인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인가, 다 큰 어른인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인가, 적은 사람인가’, ‘나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인가, 낮은 계급의 사람인가’ , ‘나보다 기술이 좋은 사람인가, 형편 없는 기술의 사람인가’ ……….


  그러나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자체가 명쾌하게 이분법으로 나눠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다가, 그런 이분법적 태도는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 본능과 누군가 권위있고 능력있는 사람 밑에서 굴종하려는 노예본능을 촉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입니다. 어느 때는 착하다가 어느 때는 악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착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나’를 기준으로 해서 위 아래로 나누려고 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나 보다 위’라고 판단된 이에게는 굴종하려고 하고, ‘나 보다 아래’라고 판단된 이에게는 군림하려 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께서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지 못했지만, - 아니 오늘 성경의 기록자가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는 분명 고향 땅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떠나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왜 고향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을까. 인정 받는다는 게 뭘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한 저 스스로의 답변은, - 어쩌면 예수의 생각은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 딸로 응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린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지식이 적거나 많거나, 재산이 있거나 없거나, 학력이 좋거나 나쁘거나, 그 성품이 어질거나 모가 나거나 ……… 그 모든 이분법적 잣대를 꺾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동일한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응대하는 삶”,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께서 고향 땅을 떠나시면서 남기겼다는 말, 즉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는 성서의 기록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이며, 또 마태의 기록, 즉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에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시지 않으셨다”는 기록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록들은 예수께서 품으셨던 하느님의 아름다운 진리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삿된 표현들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사람은 모두 하늘입니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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