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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요 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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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요 4:3-14)
 

이 시간 살펴볼 말씀은 시대를 초월해서 읽는 이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줍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뿌리 깊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깨고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셨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나타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북방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 때 앗수르는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고, 그 대신 앗수르가 점령한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보내어 살게 했습니다. 이 때 그 땅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통혼하여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족속이 생겨났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을 자기들도 선민의 조상 야곱의 자손이라고 여겼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선민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사마리아인은 이방인들에 의해 선민의 순수성을 더럽힌 저주받은 족속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전통 유대인들은 유다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행하면 금방 갈 수 있는 데도 발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을 둘러서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결정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의 편견에 동조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직접적인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을 목자 잃고 방황하는 양처럼 여기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혈통 상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셨지만, 유대인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4-16)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이 여자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길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 여자를 구원하려고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길 잃은 양은 제 발로 양 우리를 찾아오지 못하며, 시간이 갈수록 우리에서 먼 외딴 곳으로 갈 뿐입니다. 그러다가 이리나 늑대 또는 사자와 같은 맹수를 만나 잡혀 먹히거나 혹은 길을 잘못 들어 벼랑 밑에 떨어져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굶어 죽거나 독수리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양을 살리려면 목자가 찾아 나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 구원하시러 오신 영혼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아침에 유대 지역을 떠나 정오쯤 되었을 때 사마리아의 수가 성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 혼자서 그곳 우물곁에 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그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하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조상 야곱이 그 우물을 파서 그들에게 물려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웬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말속에는 놀라움과 더불어 비웃음이 섞여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이 여자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구하셨는데, 지금은 오히려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여자가 대꾸했습니다. “선생님,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십니까?” 지금 그곳에는 우물이라곤 야곱의 우물 하나밖에 없는데, 이 유대인은 어디서 또 생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 그가 주실 행복의 차이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방금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길러 우물에 왔습니다.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에 오지 않고 그야말로 해 빛이 작렬하는 정오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것은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이유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마실 물이 없으므로 한 낮인데도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물 긷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것도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머리에 이고 날랐습니다. 그러니 물 긷는 일이 재미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사실인즉, 매일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야 하는 것은 물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물에서 얻은 물로는 갈증을 일시적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무언가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왔던 이 여자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생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귀가 솔깃해서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난생 처음 이 여자를 만났으나, 한 눈에 그 여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한 그 생각이 어떠한지 다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 가장 해결 받고 싶어 하는 문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시자, 여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으니 주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비로소 여자는 자기와 대화하는 분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는 “선생님,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유대인의 멸시를 당했지만,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존중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가 아내를 싫어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낼 수 있었고, 그 여자는 개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재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다섯 번이나 재혼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새 남편을 맞아들일 때마다 ‘이번만은 행복하겠지’라고, ‘이 남자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번 목마를 때마다 물을 들이키면서 갈증이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영혼의 목마름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에게는 세상이 주는 행복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그 본질적인 갈증을 남녀 간의 애정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 처방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으로는 근원적인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곧 바로 이전 보다 더 심한 갈증에 고통당하게 됩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살 때 행복을 맛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형제간에 사랑이 있고, 친구들 간에 사랑이 있어야 세상 살 맛이 나는 법입니다. 특히, 이성간의 사랑은 대부분의 노래와 소설과 시와 영화와 연속극의 주제로 환영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애정을 인생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처럼 여깁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여자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랑을 만나기는 불가능합니다. 남녀 간의 애정이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목마름, 곧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공허함을 술로써 해결하려고 합니다. 술은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줍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또 용기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 같은 현상은 술기운이 사람의 중추신경계를 마비시킴으로써 생겨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술이 깨면 사라졌던 근심 걱정과 공허감이 도로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 또 이를 해소하려고 술을 찾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한 다람쥐 체 바퀴 돌듯이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근원적인 갈증을 술이라는 물질로써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오락을 찾습니다.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영화도 보고, 도박도 하고, 젊은 층에서는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락이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유명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문학가치고 그처럼 인기를 누리고 하고픈 일을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학가들이 동경하는 노벨상도 수상했습니다. 사랑도 마음껏 해보았고, 돈도 많았고, 명예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와 같이 공허하다”는 글을 남기고 엽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이 애타게 갈망하는 것들을 다 가졌으면서도 자살로써 삶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현대는 물질만능주의 세상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돈이면 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은 충분한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세상의 것은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라고 하신 대로, 세상 행복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의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만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멀리 떠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와 불화한 자식의 마음에도 평안이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를 등지고서야 어찌 평안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인생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종교들도 길이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의 죄 값으로 당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려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원수 되었던 관계가 청산되고 아버지와 자녀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더 이상 고아와 같이 버림받은 자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매일같이 대문을 열어놓고 가출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아들은 거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몰라보게 달라진 아들이지만 단번에 알아보고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종들을 불러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유를 만끽하려고 먼 나라로 갔지만, 자유를 누리는 것도 잠시뿐이고, 그만 재물을 다 탕진하고 인정머리 없는 주인 밑에서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들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면 참으로 자유롭게 살 줄 알지만 그 순간부터 악랄한 마귀의 손아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그의 종된 자들을 절대로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요 10:10). 

그러므로 마귀의 종 된 인생은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이 쥐엄 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졌듯이, 죄인들은 항상 영적인 기근과 기갈 속에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종 되었던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영혼의 참 만족을 누리면서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곧 성령을 가리킨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에 보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배에서 흘러나는 생수의 강”은 둘 다 성령을 의미한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날 오랜 여행길에서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반석에서 터져 나온 시원한 생수는 일순간에 모든 피로를 씻겨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길에서 피곤하고 지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기만 하면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에 임하셔서 영생의 샘이 되시고 생수의 강이 되십니다. 

성령께서는 잠시 와 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또한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슬픈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상처 입은 자를 싸매어 치료하시며, 고독한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며, 근심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내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성도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고독해 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였는데, 이 같은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심령이 행복하지 않을 리 만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혼의 갈증으로 고통당하던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하게 된 것처럼, 성도님들도 동일한 은혜를 입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물이 솟구치는 샘을 곁에 두고서도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여 울부짖었던 하갈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님들의 눈길을 한번 떠나온 세상으로 향하지 마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날마다 마심으로 생명이 넘치는 활기찬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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