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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 (사 30: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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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사 30:18-26)
 
 
1. 기다림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最長壽로 공연되는 연극 가운데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질 무렵,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한 그루의 나무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리공’이라는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데서부터 연극은 시작됩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아주 오래된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다소 황당한 대사와 광대놀음은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오랫동안 반복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횡설수설하는 대사와 황당한 행동은 ‘고도’가 오면 끝난다는 희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하루해가 다 질 무렵, 양치기 소년이 등장하여, “고도는 내일 온다”는 말을 전합니다. 연극을 보는 이들은 이 소년이 “양치기 소년”이라는 것에서 소년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양치기 소년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로 장난을 치던 그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제 1막이 끝납니다. 제 2막은 그 다음날인데요. 2막에서도 내용은 똑 같이 되풀이 됩니다. 그리고 2막의 마지막에도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년이 나타나 어제와 같은 말을 하고 사라집니다. 만약 제 3막이 있다면, 3막 역시 내용은 똑 같을 것이고, 기다림의 상황 역시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아주 단순한 연극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기다림의 대상인 ‘고도’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고도’가 神인지, 구원인지, 희망인지, 사랑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고도가 무엇이냐’ 혹은 ‘고도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상징일 뿐입니다. 이 연극은 인생이란 그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인생은 수많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 기다림은 인간의 본능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도 그 뭔가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일 텐데요.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오셨는지요?

오늘 본문에도 기다림이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본능처럼 되어버린 한 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누구이며, 그리고 그 분이 기다리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2.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흔히들 ‘기다림’은 “약자의 전유물”이라고 말합니다. 즉 주로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이 기다리는 쪽이고, 가진 자보다 없는 사람이 기다리는 쪽이며, 높은 자보다 낮은 자가 기다리는 쪽입니다. 그렇지요? 전에 단기선교를 간 어느 나라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 비자를 수월히 받기 위해서와 우리가 가져간 약품과 의료기자재 때문에 관리에게 약간의 돈을 얹어주었더니 출입국 절차 없이 그대로 공항을 통과시켜주더라고요. 먼저 와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분들에게 상당히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몇 푼 찔러주는 것을 하지 않아서인지 일일이 포장한 박스를 뜯어서 보는 바람에 시간이 걸려 결국 그 공항에서 제일 늦게 나와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어디에서든 기다리는 쪽은 약한 자, 없는 자, 낮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와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8절,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앞날을 예언하면서 禍와 福을 선포한 말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킬 禍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만, 그러나 그 禍의 목적이 回復임을 오늘 본문 이후서부터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을 품고 있는 전체 말씀은 회복에 관한 것인데요. 이러한 이사야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은 ‘대망한다, 간절히 열망한다’는 뜻입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기다린다는 말씀은 베드로후서 3장 8, 9절에 보면 더욱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간절하게 기다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기 위하여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무엇일까요? 성경 원어로 “하난”이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시편에 가장 많이 쓰인 말 중 하나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삶의 환난, 고난, 위기, 고통(시31:9), 외로움(시25:16), 그리고 죄와 그 결과로 인한 번민(시51:1) 등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는데, 그때 쓰인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 인생의 위기를 만난 성도들, 고통 중에 있거나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 그리고 외로워하고 가난하고,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 그리고 “긍휼히 여기려 하신다”는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 젖먹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사 49:15). 시편 103편에서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시 103:13).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자기 자식을 향한 부모의 깊은 애정을 뜻하는 말이지요.  그런데 이 “긍휼히 여기려 하신다”는 단어 앞에 “일어나시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적극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말이지요. 이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둘째 아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집을 떠난 그 날부터, 아마 아들은 집을 떠난 그 순간 아버지를 잊었겠지만, 아버지는 한 시도 그 아들을 잊지 않고 걱정과 염려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때로는 문 밖에서, 때로는 동네 어귀로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예상했던 대로 아들은 돈 떨어지고 갈 곳 없어지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거지 신세가 되자,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돌아오는 아들을 그동안 계속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15:20).”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 뿐 아니라 긍휼히 여기기 위하여 일어서신다는 표현은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습니다(행7:56). 예수님께서 일어나 서서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이고, 순교 당함으로 천국 오는 스데반을 앉아서가 아니라 일어나 맞이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일어나기도 하시고, 앉기도 하시고, 기다리기도 하십니다. 이것만 본다면 뭔가로 안절부절못해 하는 어른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은 그 이유가 저와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긍휼을 베풀기 위하여, 일어서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대학교 2학년인 k군이 어느 상담가의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그의 문제는 부모와의 갈등이었습니다. 몇 차례의 상담이 오고간 후, 상담가는 k군에게 ‘부모님께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망설임 없이 ‘기다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상담가는 그가 말하는 기다림의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기다림은 믿음을 가지고 저를 지켜보는 것을 의미해요. 물론 아직은 부족해 보이고 잘못될까 염려도 되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싶어요. 

설사 잘못 되더라도 믿고 기다려준다면, 제 힘으로 일어나서 나아갈 자신이 있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상담가가 보기에 그 학생의 내면에는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들은 아들의 그런 점을 알지 못하고, 또한 믿어주지 못하고, 그리고 기다려주지 못해서 항상 닦달하고 꾸짖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時間과 空間을 초월하여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오늘 본문은 그 배경을 알면 더더욱 감동적입니다. 본문 앞부분인 15절부터 17절을 보면,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굉장히 긴박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한고로 징계를 당하여 적의 공격을 받아 도피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말이나 다른 짐승을 타고 도망하는 등 피하기에 바빴습니다. 즉 자기가 취할 수 있는 것들을 능력껏 동원해서 도망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말을 타고 도망가려고 해 보아야 적들이 더 빠른 짐승을 타고 너희를 쫓을 것이다. 너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어리석은 일을 반복합니다. 자기들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가 복 되도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를 찾으신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아시고,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로 나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의지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을 무안하게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자신을 외면하고 긴 기다림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뭐라고 외치십니까?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살 길이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요, 행복하고 즐겁게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찬송가 작가인 파니 J. 크로스비(F. J. Crosby, 1820~1915)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령한 눈으로 살아계신 주님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찬송을 作詩했는지 모릅니다. 531장도 그가 지은 시입니다. 그 중 1절과 3절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안 받고 점점 더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나아오라.”
“주께서 지금도 기다리네 기다리네 기다리네/ 죄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나아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그 소원을 이루어 형통케 되며(시37:7), 원수의 악을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잠20:22). 그러기에 솔로몬은 잠언 8장에서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잠언 8:34)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다려주시는 참 좋은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기다리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이 말씀들처럼 성도 역시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문제의 핵심에서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다리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원과 기대를 채워줄 세상의 그늘로 들어가지 않고,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기다림은 약자의 행동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자가 아닌데도 도리어 약자인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기다리신다면, 약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믿음과 기다림은 비례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과 약속을 해 놓고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늦을 경우, 그가 여러분이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분과 별로 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평소 그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를 기다리지 않겠죠. ‘내 이럴 줄 알았어!’ 하고는 약속 장소를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약속의 상대가 하나님이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하나님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무슨 공적인 관계나 혹은 계약을 맺고 어쩌고 하는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가 그 자식을 사랑함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긍휼히 여기시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충분히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기다림”의 반대말을 “조바심”, 혹은 “조급함”, 또는 “행동함과 분주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움직이고 일을 저질러놓고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 신앙입니다.

신앙에 성공한 사람들은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인생에도 성공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응답하실 때까지, 은혜를 주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7~9).” 여호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에 영향 받지 않고, 넘어서기 어려운 문제가 앞에 있다할지라도 흔들리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점점 이 기다림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속성인지라, 제 철 과일이나 채소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현대인들은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퇴화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기다리는 것을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디서든 조금만 기다려도 짜증이 나옵니다.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는 것을 손해 보는 것처럼, 자신이 능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기독교 작가 금상을 두 번이나 받은 탁월한 저자입니다. 그의 책에 자신이 크게 실수할 뻔 했던 일을 적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의 직원들과 함께 유명한 리더십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너무나 그 모임을 기대했던 탓에 맨 앞줄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드디어 기대하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자꾸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짜증이 났지만 ‘조금 있으면 그만 두겠지’ 하고는 참았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종반에 접어 들 때까지 그 소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참다못하고 목사님은 뒤를 돌아보고 막 “조용히 좀 하실 수 없어요” 라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 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참! 여러분 죄송합니다. 강의 전에 먼저 소개했어야 했는데 오늘 소개할 귀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중 한분은 루마니아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장로님이십니다. 이 집회를 사모해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영어를 몰라 다른 분이 통역을 해주고 계십니다. 잠깐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바로 목사님 뒤에서 속삭이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해 못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왜 저렇게 살까?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그 이유를 알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루카도 목사님은 그래도 강의 종반까지 기다렸기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남의 사정을 알 때까지 기다려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다림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전국시대(1467년부터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교토로 진군한 1568년까지) 3대 위인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꼽습니다. 이 사람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세 사람에게 울지 않는 새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본다면, 多血質인 오다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죽인다’ 라고 할 것이고, 교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울게 만든다’ 라고 할 것이며,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이라고 믿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죠. 이렇게 기다림이 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세상이나 다른 사람에 휘둘려 이리 뛰고 저리 뜀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능력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림이 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가 1년을 더 기다리지 못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가정의 문제와 아픔을 경험해야 했고 지금의 중동 문제의 불씨를 만들었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택해서 세운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몰락하게 된 것은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블레셋에게 유린당하던 이스라엘이 사울 왕을 앞세워 블레셋을 공격함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고, 블레셋이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로 공격해왔습니다. 

그들을 본 이스라엘은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던 중 와서 제사를 인도하기로 한 사무엘이 어쩐 일인지 약속된 날짜에 오지 않았고, 무서워하던 백성들은 하나 둘씩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사울은 하나님의 법을 깨고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더디어 보이고, 때로는 안 될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이미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조급하고 서두르고 그러다가 세상의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다가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결코 조급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지옥에 열두 번도 더 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다리심 때문에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것입니다. 

4. 기다리심과 기다림, 그리고 해후!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기다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오래 전부터 기다리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딴 데로 엉뚱한 대상에게로 향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내가 기다린다, 너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기 위하여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어떤 사람이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설사 생명이 끊어지고 모든 것이 ‘상황종료’될 것 같은 그런 순간에라도 “조바심”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먼저 행동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다림의 반대말은 불신입니다. 즉 기다림은 믿음의 표현이란 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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