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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언과 같이 고난 당하신 메시아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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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과 같이 고난 당하신 메시아 (사 53:1-9)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때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보다 700-800년 정도 앞선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한다. 

1. 나를 대신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다(1-3).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호와의 팔은, 신인동형론적 묘사다. '나타나다'는 (  ) 감추었던 것이 벗겨져,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의 손길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잘 설명하였다. 

(요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버림당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던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당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씀했다. (눅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당하셨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연한 순(묘목) 같이, 나약해 보였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다. 

바싹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예수님은 고운 모양(아름다운)도 없고, 위풍당당한 화려한 풍채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었다. (요8:57)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초라한 모습 때문에 멸시 당했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았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마27:17下)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질렀다. (마17:21) "…바라바로소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강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 버린바 되었다. 

예수님은 간고(어려운 고통, 슬픔)를 많이 겪었다. 온갖 질고(병으로 고난)를 당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때렸다(마27:29). 침을 뱉으며, 갈대로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다(막15:19). 사람들이 멸시하는 가운데,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도 (마27:40下)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멸시를 당하셨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다. 

(마27:46下)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다. 인류 역사상 누가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았나? 없다. 

우리도 살다보면, 남에게 멸시 당하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다. 배우지 못했다고, 가진 게 없다고, 못생겼다고, 멸시 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버림받으셨다. 

우리가 버림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버림받았다. 그러면 예수님이 버림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렸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다(빌2장).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문자 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보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사회에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은가?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 다닐 때, 늘 꼴찌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땠는가? 

선생님이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다. 음악가 베토벤은,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신문기자였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기 바란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철저하게 버림받은 예수님이, 붙들어주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 

2.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다(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은 슬픔은 3절의 간고와 똑같은 단어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고통, 슬픔)를 대신 지셨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다. 

용수는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다. 그런데 커갈수록,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했다.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다. 심지어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뒷동산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타이르고 달래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참다못한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사정없이 다그쳤다. 그때 용수가 소리내 울면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밝혔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엄마 얼굴이 귀신같다고 놀려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때 엄마는 왜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되었는지, 용수에게 설명해 주었다. "얘야, 엄마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고왔어, 그런데 네가 갓난아이 때, 너를 집에 재워두고 나왔는데, 집에 불이 났단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제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께요." 그는 집밖으로 나왔다. 동네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소리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럽지 않아! 우리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되셨다. 엄마 때문에 나는 살았다. 

이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쁜 미인이다!" 용수는 그때부터, 다시는 엄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지셨다. 슬픔을 당하신 이유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왜 가시 면류관에 찔렸고,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렸나? 허리는 날카로운 창에 찔렸나? 왜 몸과 마음이 상하셨는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았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죄악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제물이 되셨다.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나? 죄로 멍든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에게 나음을 주기 위해, 채찍에 맞았다. 따라서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밑으로 나오기 바란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대신 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받게 된다. 

우리의 구체적인 죄는 무엇인가?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교만하여 선한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다. 다시는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큰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살았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왔다.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된다. 너무 불길이 세기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 없다. 인디언들은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 한 사람이,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 또 불을 지르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불을 질렀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님이 다 지불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우리를 사서, 풀어주셨기 때문이다. 

3.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지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시는 모습을 예언했다(7-9).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했다. 유대 재판은 밤에 열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변호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누가 봐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이다. 억울한 재판을 당할 때,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다. 또한 헤롯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온갖 희롱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다. 

로마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셨다. 왜 침묵하셨나?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나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기에, 인내하면서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누가 봐도 불의한 재판이니,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았다.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입을 다물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셨다.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 침묵하셨다. 힘과 권세가 없어서 침묵하지 않았다. 

당장 하늘로부터, 열두 영(      ,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마26:53)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침묵하셨다. 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기에, 끝까지 침묵했다.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강포(强暴)를 행하신 적이 없다. 그 입에 속임도 없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다.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그러나 악인처럼 취급당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도가 아니기에,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아, 부자와 함께 묻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다(막15:43).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다. 요셉은 자기 시신을 자기를 위하여,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고이 모셨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7-8백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미 7-8백년 전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이미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침묵하셨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었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지만, 못난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도,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내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조금 힘들다고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이 상한다고, 입을 열어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침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 그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남의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대성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입을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몸과, 손발을 많이 움직이기 바란다. 그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많이 움직여 떠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철저히 버림 받으셨다.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며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침묵하셨다. 이번 한 주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에 힘쓰기 바란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자.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침묵하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기 바란다.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은혜롭고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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