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나귀 새끼를 타시니 (막 11:1-11)

첨부 1


나귀 새끼를 타시니 (막 11:1-11) 

주제-사순절은 주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다루면서 다가오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본문이 수록된 마가복음을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장소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다면 1-9장이 전반부이고 10-16장까지가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의 주된 사역지는 물론 갈릴리입니다. 10장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11-16장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보내신 마지막 한 주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불과 한 주간에 일어난 일들을 적는데 마가복음의 삼분의 일이나 할애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성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입성하십니다. 

유월절은 430년간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팔레스타인 지역뿐 만 아니라 소아시아나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몰려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순례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입성하십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이요, 사역을 마무리 짓는 중대한 시점에서 전에 있던 방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누구나 알 수 있게 무리들의 환호 속에 성으로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장면들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비결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이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예수께서는 친히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이 되어 단번에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유월절의 의미를 완성하시려고 합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해 있고, 예루살렘 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신 아주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도 여기에 있고, 주님의 승천도 바로 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있는 마을인데, 특히 베다니는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감람산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벳바게로 갔습니다. 벳바게는 산봉우리 가까이에 있는 곳인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여기서 나귀를 구하여 타셨습니다. 군중이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내리막길입니다(눅 19:37,38).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공개 수배를 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발생할 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요 11:55-57). 

어두움의 영으로 덮인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결연한 모습을 통하여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의 중심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사사시대를 거쳐 약속의 가나안 땅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점령한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를 그곳으로 정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자리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마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의 지위를 가지고 들어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상태에서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1) 공개적으로 

이전에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면서도 그것을 비밀로 하기 원하셨고,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도 미리 아시고 피하기도 하셨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고난과 수치와 모욕의 길이었지만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나귀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고 또한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앞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을 마을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아직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약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쓰시겠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보니 과연 예비하신 나귀 새끼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풀어서 주님께 끌고 왔습니다.   

2) 나귀 새끼를 타고 

그 당시 왕들은 자기가 타는 말에 금빛 나는 화려한 안장을 갖추게 하고 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행진을 했습니다. 동원된 무리들에게 왕이 지나갈 때 왕의 이름을 연호하게 하며, 자기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란 말은 아직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어린 나귀를 가리킵니다.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왕은 왕이지만 무력이나 군사력으로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임을 상징합니다. 낮아지심과 섬김의 메시야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스가랴 9:9을 인용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나귀 새끼를 끌어왔을 때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새끼 나귀의 등 뒤에 걸쳐 소박한 안장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며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 놓았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소리를 질러 댑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들의 외침은 시 118:25-26을 토대로 합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대하는 소망이 담긴 노래이기도 하지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향하여 환영하는 노래로서 순례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쳤으며  예수님을‘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부르고, 예수님의 나라는 '다윗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나라는 메시야가 이룰 왕국을 의미합니다. 호산나는 아람어인 hoshana에서 온 말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원했던 다윗의 나라는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독립된 나라를 이룰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의 나라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이루실 메시야 왕국은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의도나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이렇게 예수님을 환호하고 맞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불과 일주일도 못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6을 보면 제자들조차 종려주일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더니 나중에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유월절에는 죽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였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촉발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예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십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가 단순한 예루살렘이 아닌 예루살렘에 위치한 성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 곧 주님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에 제자들과 많은 백성들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당국이 그를 체포하지 못한 것은 그로 인한 일반 백성의 소요와 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 지금 성전을 둘러보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과 성전이 하나됨을 제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확인하며 선포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전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예수님께서 날이 이미 어두워지자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기도나 어떤 경건한 예식을 했다는 말이 없이 그저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나가셨다는 것은 다음 날 일어난 성전청결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당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호한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반하고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1)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욕심을 따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윤리적으로 고결하신 분입니까?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입니까? 고난을 당하는 민중을 위한 해방자입니까? 물론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엄청난 사회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여권이 신장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신앙생활은 예수께서 구원자 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바르게 믿고 고백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앙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온전한 봉사를 할 수 없고, 온전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린 주님은 신성 모독죄로 죽임을 당한 사형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참된 구원 방법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지금 리더 훈련에서 '풍요로운 삶'이라는 교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재 자체는 신앙의 기초를 다루고 있지만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라도 신앙의 기초를 다시 점검하고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과, 또한 배운 것을 가지고 다른 분들을 섬기는 것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목사가 바라기는 모든 팔로마 교우들이 주님을 바로 알고 확실한 신앙의 기초 위에 서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겼으면 합니다. 이제 훈련을 통하여 참가한 분들이 좋은 리더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들의 섬김을 통하여 전도의 열매, 섬김의 열매들이 많이 생기도록 아울러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2) 주님에 대한 바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호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께서 자기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생애의 목표였고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도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처럼 주님의 의도를 모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었습니다. 그때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가진 열정의 모델은 비느하스였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이 전하여준 꾀를 이용하여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싯딤에서 바알에게 절하게 하고 모압 여자들과 더불어 음행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음행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염병으로 인하여 무려 24000명의 이스라엘 남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시므리가 미디안 여자 고스비를 데리고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니 그것을 보고 비느하스가 따라 들어가 창으로 그들을 단번에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비느하스가 가진 열정은 이후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흠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도 그런 열정을 가지고 예수쟁이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열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고꾸라진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을 계기로 그는 회심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그의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곳에 교회가 세월졌고 그가 쓴 편지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떤 열정이 있으십니까? 그 열정이 정말로 주님이 기쁘시게 하는 열정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열정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상처를 주는 열정입니까? 우리의 열정은 주님께 기쁨이 되어야 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열정을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이 바른 영향으로 나가게 되고 열정도 계속 유지됩니다. 

신앙에 바른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의 뜻과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설령 자기가 원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자기가 수치를 당해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높임을 받으면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여전히 주님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과 열정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3) 주님에 대한 바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막 8:31) 세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성에 들어가시면 수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시면서도 두려워하거나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의 앞에 서서 나아가십니다(눅 19:28).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주님은 사명에 충실하시며 순종과 헌신의 본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시고 당신의 필요에 따라 주권적으로 사용하시고 다스립니다. 왕으로서 필요한 것을 징발하십니다. 그러나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억지로 빼앗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섬기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즉흥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미 메시야가 임하실 때에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표시로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슥 9:9).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건너 편 마을로 갔던 두 제자들은 과연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 말하니 나귀 주인은 자기의 나귀를 선뜻 내어 주었습니다. 그의 드림을 인하여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감으로 스가랴 9:9에서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라는 예언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나귀 주인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였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구속 드라마에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헌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헌신자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입성식에 참여했습니다. 두 제자는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위에 걸쳐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놓았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였습니다. 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찬송 소리가 듣기 싫어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할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거나, 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주님을 높이지도 않을 때,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키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작게 여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중심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헌신을 기억하시고 또한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쓰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며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나귀 주인이 기꺼이 드렸던 것처럼 주님과 다른 사람이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봉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4) 주님을 본받아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요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정복자가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는 그와 같이 갈등이 있는 두 그룹 사이를 중재해서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샬롬’은 단순히 평화가 아니라 번영, 건강, 전쟁이 없음, 나라와 나라사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좋은 것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화평케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상처 있고 문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과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고 또한 인간 사이의 막힌 담도 허물어져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화평의 일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마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할 때, 마음을 열고 진실함을 보일 때 참다운 의미의 화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만 펼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할 때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 옳다고 할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 12:24-25,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우리가 죽는 밀알이 될 때 이웃과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화평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라 불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평한 삶이 아닙니다. 회개 없는 신앙. 순종 없는 신앙생활. 반쪽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헌신, 섬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이 평강을 깨뜨리려는 어떤 시도가 있어서도 안 되고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히브리 기자는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정신없이 살아왔던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했는지 점검해봅시다.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배신했으나 주님은 회복시켜 초대 교회의 귀한 리더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그의 세계관을 바꾸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셔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주간에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주님과 막힌 통로가 활짝 열리기 바랍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요 구주시기에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님의 뜻대로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언제든지 우리의 것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교우들이 속한 삶의 현장 그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평강을 도모하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고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는 이 귀한 계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과 복 주심을 경험하고 나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