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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사함 받은 행복 (시 32:1-7)

첨부 1


죄사함 받은 행복 (시 32:1-7)


Ⅰ. 에덴 동산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마늘 밭을 보면 
그냥 지나가질 못한 답니다. 
어디 고랑에 튀어나와 있는 비닐 가방 같은 거 없나 하고 말입니다. 
불의한 돈 110억원을 묻어 두었던 그 마늘 밭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하루에 수십명씩 그곳을 다녀 간답니다. 
110억원이 묻혔던 곳에서 돈 냄새라고 맡아보고 싶은 모양이지요.

“돈다발, 돈벼락” 이나 맞았으면 좋겠다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가 어떤 곳일까요?
그곳은 완전한 행복이 있는 곳일텐데.
우리는 천국의 그림자를 에덴동산에서 그려볼 수 있습니다. 

1)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행복한 교제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 하나님과의 교제는 온전한 예배였고 온전한 기도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셨고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면 아담은 언제든 달려갔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2) 에덴동산에는 아담과 하와, 인간과 인간의 온전한 관계, 온전한 행복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사랑의 고백과 배려, 존경과 격려가 있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갈등, 상처, 섭섭증, 미움이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행복한 곳이 천국입니다. 

3) 에덴동산에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물질 간의 온전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자연을 잘 돌보았고 자연은 아담을 잘 섬겼습니다. 

동물들도 아담 하와를 잘 따랐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다정한 친구와도 같았습니다. 
어린이와 사자가 함께 뒹굴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넣고 장난치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행복한 관계와 질서를 지켜주는 말씀나무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서로의 위치를 존중하고 질서를 존중하기로 약속한 선악과라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인간은 자신도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온 자연과 물질을 자신이 다 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악과를 따 먹고 모든 관계, 모든 약속, 모든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관계를 잘 지키는 것이 행복이요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1)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 아담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다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찾던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기 시작했습니다. 

2)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그대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나뭇잎사귀를 뜯어 이곳 저곳 부끄러운 곳을 가려야 했습니다. 
하와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사라졌습니다. 아담을 향한 존경이 사라졌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준 저 여인이 내게 선악과를 먹였나이다.”
서로 핑계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서로 비난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3)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졌고 동물들 간에도 서로의 질서와 배려가 깨어졌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은 인간을 공격합니다.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 먹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열매요 죄의 결과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성공하고 출세할까 하는 문제 같지만 사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나도 질병도 갈등도 전쟁도 죽음도 - 모두 죄 때문에 온 저주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너도 죄인이요 나도 죄인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온전한 행복이 올 수 없습니다. 

II. 죄는 죄다

어떻게 이 인간불행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용서 받아야지요.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의 참회시 일곱편 (6:, 32:, 38:, 51:, 102:, 143:)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참회시 라고 하면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내 마음이 아픕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는 범죄고백, 심정고백, 사죄 요청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참회시는 여느 참회시와는 달리 
사죄함 받은 기쁨과 감사의 간증이 담겨있습니다. 
천국에 사는 자는 마늘 밭에 돈다발 묻어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용서함 받은 자 라는 겁니다. 

시편 강해를 계속하는 중에 오늘 고난 주일, 마침 회개와 죄사함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죄사함 받은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죄에 대한 네 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1) 첫째 1절의 허물(페솨)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사는 반역을 말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둘째 1절의 죄(하타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과녁을 벗어났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에 인생의 목적이 삐뚤어진 것입니다. 

3) 셋째 2절의 간사함(레미야)은 죄자체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자기기만”이란 뜻으로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고도 
양심을 짓누르고 자신을 속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상한 음식을 먹으면 토해내야 살 수 있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죄를 숨기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넷째 5절의 죄악(아온)은 마음이 꼬인 것, 구부러진 심보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꼬여 짓는 죄를 말합니다. 
상처 때문에 짓는 죄입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짓는 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 상처, 성격적 결함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죄 안짓고 사는 사람 어디 있느냐고?
세상 살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약점 많은 인간으로 만드셨으니 어쩌겠느냐고?
핑계를 대 봅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이유, 어떤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장편 소설이 있지요.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초인주의사상에 빠집니다. 
선택된 의인, 선택된 강자는 죄를 지어도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면 선이라는 사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수전노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고 돈을 훔쳐 큰일을 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인자라는 가책과 죄의식 때문에 몰락해 간다는 얘기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죄는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시32:3-4)

III. 다윗의 범죄

성경에서 다윗이란 인물은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다윗이란 이름이 약 800번정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보다 많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을 펼치면 예수님을 등장시키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로 문을 엽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외에 제일 중요한 인물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워 집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왜 이리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할까요?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큰 죄인이었다는 겁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고사하고 
세상에 드러난 간음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파렴치범이었습니다. 
자신과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던 충신을 죽게 만든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하였고 

“내 종 다윗은 정직한 자”라 칭찬했습니다. 
왜요? 그는 정직하게 회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죄의 은총, 용서받는 기쁨과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박물관에 특별한 그림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서 주교가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앞을 가로막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기에 더욱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전인 주후 3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부하 장수가 살해 당하자 잔혹한 보복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황제는 보복명령을 철회하였지만, 
이미 그곳에서는 1500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황제의 이런 끔찍한 대량학살을 엄히 정죄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성당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습니다. 
중세의 성자 어거스틴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위대한 분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끔찍한 학살을 꾸짖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정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않고는 이 성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 앞에서 땅바닥에 엎디어 참회를 합니다. 그리고 그해 성탄절 때 다시 성찬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효관, 「용서받은 자의 축복」중에서)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여 용서함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이 서로 용서를 배워 가는 곳입니다. 
다윗은 죄의 아픔을 알고 회개의 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와 간통하고 임신까지 하게 만들고 부하를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버젓이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여 희희낙낙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에게 “양과 소가 많은 어느 부자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 집 우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 동네 가난한 농부의 한 마리 밖에 없는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부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다윗은 노발대발합니다. 
“내가 다스리는 이 나라에 그런 인간이 살다니 죽어 마땅하도다. 
당장 4배나 갚도록 하라” 소리를 쳤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권위로 다윗에게 말합니다. 
“그가 바로 당신이요” (삼하 12:7-12)
이때 다윗은 성령의 비수에 찔린 듯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사죄의 확신을 얻고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시편 32편입니다. 

IV. 사죄의 은총

오늘 본문 다윗의 참회시를 살펴 보면-

1) 첫째 다윗은 죄를 속에 담고 사는 고통을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 “종일 신음했다”고 고백합니다. 
 • “배 뼈가 쇠하였다”고 고백합니다. 
 •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 “내 몸이 지옥에 빠져드는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관절 마디가 꺾여지고 건강이 무너졌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내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자신감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죄의 고통입니다. 
지은 죄를 아파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2) 둘째 다윗은 회개가 복이요 회개가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2절)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려주셨기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범죄의 현장에 벼락이 떨어졌다면 여기 있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주신 것은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은 말씀을 내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병 중에 누워 있을때 성령과 나단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사업이 어려울때, 자식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성령의 음성과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때는 회개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다윗은 이 기회를 얻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감동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의인됨의 시작입니다. 

3) 셋째 다윗은 사죄의 기쁨과 감격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6-7절)

오늘 우리가 주의 사랑과 보혈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할 때 
주는 우리 죄를 사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네 죄를 옮기리라”
“네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9)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회개하면 용서하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4) 넷째 다윗은 참회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참회시들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서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섭섭함을 들어내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어쩔 수없이 순간적 유혹, 함정에 빠졌었노라”고 자기 핑계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내 잘못일 뿐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깨끗이 맡겨 놓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핑계가 남아있고 환경과 타인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V. 사죄함 받은 행복

오늘 본문 시편 32편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4:6-8에서 이렇게 인용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을 오래전 다윗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는 겁니다. 
“사죄의 은총” “그것이 복되도다” 즉 그것이 성도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복은 얻었는데 
신앙생활,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행복하기를 원하면 
“나는 죄로부터 자유하다. 해방받았다. 정죄함은 끝났다. 
 나아가 나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다. 비난하지 않는다” 
이 선언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이 한참 어려움에 직면하고 내적 갈등이 있을 때에
마귀가 찾아옵니다. 마귀의 손에 큰 책이 한권 들려 있었습니다. 

펼치자 마자 마틴 루터의 온갖 허물과 죄가 가득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죄인인 네가 종교개혁을 해.” 낙심시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루터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그것뿐이냐. 너는 내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것은 모르는 구나. 
아마 열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라. 
그리고 지금 그 책 마지막에 기록해라.” 

요한1서 1:7 하반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마귀는 “예수의 피”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갔습니다. 

♪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여러분, 사죄의 은총을 아는 사람의 마지막 행복이 있습니다. 
사유하심을 받은 사람은 남의 허물을 가리워야 합니다. 
남의 죄를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남편을 정죄하고 부모를 정죄하고 남을 정죄하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친구 관계도 부부관계도, 교우 관계도 서로 허물과 약점을 가리워줄 때 
서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식도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자식이 행복의 기업이 아니라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여러분, 이웃의 허물이 보이면 이 타락한 눈을 보혈로 씻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입을 열어 정죄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1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5절)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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