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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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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고전 15:12-19)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 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아도 그것들은 결국 죽음 앞에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죽음 뒤에 있을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작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2010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5,000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5,000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광진구의 전체 인구가 37만5천명인데. 그렇다면 25만 명은 광진구에 사는 사람들의 70%에 해당합니다. 1년에 광진구 인구의 7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의 능력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힘이 무용지물입니다. 천하를 호령할 만한 기개나 권력도 죽음을 피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해져버립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장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세속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 들였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먼저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간 자들과 자기 또한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것인가를 피를 토하듯 증거하고 있습니다.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칸타타로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 포천에서 영통에서 이곳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죽음이 하나님을 붙잡았으니 그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의 승리는 겨우 사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로잡아 결박하셨습니다. 이제 그 죽음은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한 생을 후회없이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너무나 황홀하기에 이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황홀한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주님 붙잡고 이 땅에서 주께서 맡긴 사명을 당당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지금 조국 한국은 나라를 바르게 섬겨야 할 위정자들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금융 사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납니다. 돈이 있어도 은행에 맡길 수 없는 세상, 사랑스러운 내 자녀들을 학교에 맡기기 힘든 세상입니다. 건강한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많아야하는데 실업자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용불량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며 조금만 눈을 돌리면 아직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세계는 지진과 전쟁, 그리고 기아와 굶주림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능력을 입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한국교회는 이 시대 앞에 직면한 이 문제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어떻해 보면 우리 한국 교회는 대통령도 무릎을 꿇게 할 정도로 힘이 셉니다. 지난 3월 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조찬 기도회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 대표회장인 길 모 목사가 기도를 인도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자”고 제안하자,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조 모 목사의 대통령 하야 발언 한마디에, 이슬람 채권법 논의가 잠잠해졌습니다. 힘센 청와대도 경제논리로 밀어붙이려던 정부와 여당도 잠잠해졌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 급식 반대 운동’ 서명을 받고자 여의도 모 교회와 한기총에 도움을 청하고 다닙니다. 
  
그런데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힘이 세 보이지만, 안으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동안의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가 돈 봉투 선거였다는 양심선언이 이어지더니 드디어 사회 법정으로부터 직무정지처분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의 목사들의 난투극으로 세상 법정에서 서로 고소하는 이 추태는 어느 개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전체 교회의 이미지는 실추될 대로 실추되었습니다. 

정말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타성으로 젖은 잘못된 신앙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 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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