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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평강이 있을지어다 (눅 24: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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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이 있을지어다 (눅 24:33-43)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 이상으로 의미 있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그렇게 쉽게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믿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무덤에 찾아갔다,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 너무 슬픔에 지친 제자들이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환상을 보았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을 뿐이다, 부활은 영적인 것이지 육신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등등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의 부활을 어떻게 알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제 부활의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죄를 지으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남아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패로 만들려고 별짓을 다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으셨기에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1) 여인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이 새벽에 간 것은 예수님에 대한 열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이유는 죽으신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근심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여인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무덤에서 돌아간 여인들은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림으로써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허탄한 것으로 여기고 믿지 않았습니다. 

2) 두 제자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가 낙심한 가운데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 곁으로 오셔서 말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사흘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과 여인들이 전해준 부활소식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두 제자는 함께 머물자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실 때에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자 제자들은 비로소 눈이 밝아져 지금까지 자기들과 함께 한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인줄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느꼈던 마음의 뜨거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흥분과 감격 때문에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픈 얼굴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지금은 뜨거운 마음을 갖고 다른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한 제자들과 평소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온통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들어가서 정말로 주님이 다시 사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길에서 일어났던 일, 즉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시던 것과 주님이 떡을 떼시고 나누어 주시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그 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요 20:19에 의하면 방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방안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십니까? 

1) “친히 그 가운데 서서” (36절)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인하여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강을 선포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인사말은 단순히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인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승리로 끝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요약하며 선포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신앙공동체의 기쁨과 위로의 근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평강, 즉 shalom은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평강을 가지기는커녕 도리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2) “손과 발을 보라...나를 만져보라” (39절) 

제자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여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눈치 채신 예수님이 십자가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미시며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체는 살과 뼈가 없지만 자신의 몸은 그들이 만져 볼 수 있는 것처럼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부활체를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영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부활체는 지상의 육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지만 여전히 물리적 특성을 보유합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특별하게 자신이 존재를 강조하시면서 "나는 있느니라"(3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신(출 3:14)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깨닫게 되자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동안 어안이 벙벙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3)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43절) 

예수님은 또 다른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먹을 것을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드심으로써 자신이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영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부활체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기 알맞도록 변화된 몸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그와 같은 영화로운 몸을 가집니다. 성형수술을 한 사람이 부활체를 가지면 성형전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아니면 성형 후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부활 이후의 성도들의 육체가 어떻게 변화할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그 부활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하늘의 질서에 속한 몸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체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고 활력을 공급받는 영의 몸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또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저절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부활 승리를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6). 우리 모두가 바울과 같은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우리의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성도들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말씀을 지속적으로 가까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견고한 부활의 확신 위에서 말씀에 대한 계속되는 체험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며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열한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모세의 율법과 선지의 글과 시편' 즉, 구약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 자신이 고난 받아야 한다, 둘째, 다시 살아나야 한다, 셋째,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붙들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에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롬 10:13-14). 제자들은 그 모든 일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것은 또한 오순절 이후 생겨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이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지상명령에 헌신하려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열방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의 산 소망을 삶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여기에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의미 있는 job을 구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부활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 부활이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을 주는지에 알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구은 생선을 드시면서 음식을 소화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체라는 사실이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소망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원하는 어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물리치고 다시 사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며 너무 기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의심 속에 살지 않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복음 중심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Sunday Christian 이 아니라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Christian 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Christian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삶 속에서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리스도는 우리가 소망을 두는 첫 열매이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사역은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계획의 시작이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다시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날까지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것들이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가 가진 job으로 자기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하다니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큰 기업을 소유하고 아무리 큰 지위에 올랐을지라도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job은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 받을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수고 하는 일에 복을 주십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예술가라면 이 땅에 아름다움을 가져오도록 부름을 받았다 

의사라면 이 땅에 치유를 가져오도록 부름을 받았다 

선생이라면 이 땅에 참된 지식을 전해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정치가라면 이 땅에 소외된 자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았다 

사업가라면 이 땅에 거짓없이 정직하게 사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가정주부라면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잘 쓰임받을 수 있도록 키우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에 현재의 삶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죽고 나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라는 주기도문의 내용과 같이 이 땅에서 우리의 몸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shalom을 이 땅에 가져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높이기 위하여 사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가르치고, 아이들을 키우고, 잔디를 깎고, 옷을 세탁해주고, 시를 쓰고, 노약자를 돌보고, 청소를 하고, 페인트를 바르는 모든 행위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행해져야 합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체험할 때 우리도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나 두 제자들처럼 주님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더러 이 교회를 복 주시고 각 가정을 복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의 일에 힘쓰는 가운데 성도들의 개인과 가정과 사업과 신앙생활에도 소생의 역사가 부흥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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