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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눅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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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눅 20:27-40) 


(눅20:27-40)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1. 어느 신실한 청년이 중병으로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임종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자신의 죽음을 흔쾌히 받아드리기로 하고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앞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에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그만 슬퍼하세요. 

그런 슬픔을 제가 감당하려면 저는 저의 모든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몇 백년은 더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제가 만약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 결코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의 시간이 마치 시커먼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쏟아지는 은빛 햇살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 내가 천국에 갔느냐고 누군가 어머니에게 묻거든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내 아들은 원래 그 곳 사람이었다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다 받지 못했지만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생을 세상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고백하며 살았습니다.(창 23:4,47:9,레 25:23,신 10:19,벧전 2:11) 

이러한 고백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를 돌아갈 본향으로 믿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로 충분히 돌아가 그곳에 매장되었을 것입니다.(창23:19) 만약 그들이 떠나온 옛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그리워하며 그곳에 목적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렇게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비해두셨습니다.(히11:13-16)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인류가 영원히 거할 처소, 곧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으로, 그리고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예비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약속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의 3대 종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인, 그리고 엣세네파였습니다. 이중 바리새인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믿으며(행 23:8),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B.C.1015년경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습니다. 당시 사울 왕은 블레셋의 공격으로 아주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지만 선지자 사무엘은 죽고 또한 자신이 제사장을 학살하다시피해서 모든 제사장들이 사라진 형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궁여지책으로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부탁합니다. 

무당이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올리는 초혼(招魂)행위를 하자 한 ‘혼’(魂)이 올라왔습니다. 이에 사울이 무당에게 묻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 ‘노인처럼 생겼는데 겉옷을 입었습니다.’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합니다.(삼상28:3-14)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두고 죽은 사무엘이 부활한 것으로 해석하고 부활할 때는 죽을 당시 입었던 옷을 입고 또 그 당시의 모습으로, 늙었으면 늙은 모습으로, 불구이면 불구자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당의 초혼행위로 땅에서 올라온 것은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사울 왕을 전쟁터로 몰아 죽이기 위해 사무엘로 위장한 귀신이었습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기는 믿었지만 온전한 부활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은 소위 엘리트 계층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대부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모세 오경 이외의 것은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활, 내세, 천사의 존재 등, 심지어는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행23:8) 

이들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 물질세계만을 인정하는 극히 현실주의자들이어서 세상에 최고의 가치관을 두고,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자칭 정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지만 세례 요한은 이들을 두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들을 두고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는 말씀으로 경고하셨습니다. 이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채 하지만, 사실은 종교, 정치적 기득권을 이용해서 백성들에게 보다 더 무거운 종교적 짐을 지게 하여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사탄의 기질과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무리들로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탄의 수족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음모에는 뜻을 같이 했습니다. 날로 백성들의 지지도가 높아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입지와 기득권 유지에 위기의식을 느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꺾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두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대답할 수 없는 난해한 문제를 제시해서 날로 치솟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세를 꺾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도 자식 없이 죽었고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모두 그렇게 되었으며  끝내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두개인의 이 질문은 신명기 25:5-7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신25:5-7) 만일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아들 없이 죽으면 그 미망인은 집을 나가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그 남편의 형제가 그 여자와 결혼하여 형제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이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이러한 결혼법을 ‘계대 결혼’(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 또는 ‘수혼법(嫂婚法)’이라고 합니다.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와 고대 근동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풍습(창 38:8-11)이었는데, 모세 시대에 이르러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습니다. ‘계대 결혼’의 목적은 첫째,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대(代)를 이어줄 후사를 낳아 줌으로써, 그 형제의 가문(家門)과 기업을 보존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신25:5-6,시127:3-4) 

자손의 번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여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 이를 통해 남편과 사별한 후 의지할 곳 없는 과부를 보호하고 경제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계대결혼’의 한 예(例)가 룻과 보아스 관계입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 땅에서 산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그 땅의 이방여인들과 결혼했습니다. 

그 후 10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한꺼번에 다 죽고 덜렁 청상과부 둘만 남았습니다.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며느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원한다.’ 그러자 그들은 큰소리로 울며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습니다.’며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째서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너희 남편이 될 아들을 내가 다시 낳을 수 있겠느냐? 나는 너무 늙어 재혼할 수도 없다. 만일 아직도 내가 희망이 있어 오늘 밤이라도 재혼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자랄 때까지 너희가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느냐?’(룻1:8-13) 

나오미의 이 말이 바로 ‘계대 결혼법’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계대 결혼’시킬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이고 설사 재혼하여 아들을 낳는다 해도 자랄 때까지 너희가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류에 ‘오르바’는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은 “(룻1:16-17)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면서 결국 시어머니 고향으로 함께 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는 가까운 친족 보아스와 며느리 룻이 ‘계대 결혼’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룻이 충실히 그 조언에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룻이 보아스와 ‘계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오벳’인데 바로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습니다. 룻은 ‘계대 결혼’을 통해 다윗 왕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룻4:6-22) 그런데 이 ‘수혼 제도’는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었습니다. 


3.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계대 결혼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부활을 믿는 자들의 입을 막아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7형제 중 맏이 장가들었다가 자식없이 죽었습니다. 계대결혼법에 따라 둘째가 형수에게 장가들었는데 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연달아 장가들었지만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형수마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때에 이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계대 결혼에 따라 만약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을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데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과연 부활 때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로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못한다면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사두개인의 질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에 대해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너희가 모르니까 부인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구약의 욥과 이사야, 다니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사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 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더 나아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성경 예언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무지를 들어내신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혼과 흙이 된 육체를 통하여서 영적인 몸을 만드시는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무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스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엘리트라고 자처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활과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부활 후의 삶을 ‘저 세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으로 믿었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에서의 결혼관계가 지속되거나 처녀 총각들은 시집, 장가를 가 자식을 낳고 사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결혼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고 하신 창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결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출산입니다. 그러나 부활 때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된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출산이 필요없고, 그러므로 자연히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도 없어집니다. 

부활의 몸은 이렇게 존재의 규모와 질(質)이 달라지므로 결혼관계가 해소(dissolution)되고, 결혼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 행복이 있게 됩니다. 부활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것입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문을 열고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문이 잠긴 채 나타나신 것입니다. 공간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실제 먹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질세계를 초월한 존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든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것 등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연히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흰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세나 엘리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9:28-32을 보겠습니다. 

(눅9:28-32)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예수께서 그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빛의 광채가 나더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 전이라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신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예수께서 변화되사 변화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나누신 대화 내용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별세”(departure)로 번역된 헬라어는 ‘출발’, ‘탈출’을 뜻하는 ‘엑소더스’(?ξοδο?,exodus)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로 여기신 것입니다. 또한 이 ‘엑소더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과 부활을 향한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자신과 모세, 엘리야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즉 성령이 그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안에 계신 성령으로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8:11을 보겠습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렇게 예수 부활을 믿는 사람을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고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된 모든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들의 부활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소중히 여겨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언약이 믿음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었노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현재 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 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사람들에게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 ‘출발’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가 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아니하면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예수 부활을 믿음으로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살아있는 관계를 성경 요한일서4:15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생명이 감취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안에는 영원한 부활의 생명이 감취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바로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영생(하나님 나라)은 죽음 후에 오는 것만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구약의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1:5-6을 보겠습니다.

(히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에녹을 옮기셨다는 것은, 에녹을 변화된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서 태어난 몸으로 그냥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켜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고전15:50) 에녹이 이러한 영광과 축복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자신에게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는 ‘부활의 자녀’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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