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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예수님의 전인교육 (출 23:14-17 눅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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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전인교육 (출 23:14-17 눅 2:41-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하시더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에게 5월이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5월을 영어로 May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청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5월의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옛날에는 어린이 주일을 꽃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이들은 분명 이 세상의 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참으로 천진합니다. 눈동자가 맑고 투명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도 그렇게 맑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입니다. 

교회 목사님이 어린이들 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먼저 용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 하였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한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예,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이런 어린 아이 같아야 갈 수 있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그 순수함과 맑음 그리고 꾸밈이 없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들은 그렇게 맑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영악스러워졌습니다. 세속적인 문화에 너무 일찍 길들여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남녀 교사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야 자리 비켜주자”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천진함이 순수함과 맑음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오늘 문화라는 것이 아이들에게서 이 순수함을 추하게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그만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옛날 아이들은 스스로 자랐습니다. 부모님들은 농촌에서 일하느라 바빠서 자상하게 아이들을 돌볼 틈도 없이 살았습니다. 

저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자라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의 사랑이나 관심을 자상하게 받지 못하고 자라났습니다. 여러 형제들 틈에 끼어 별로 특별한 관심도 없이 자라났습니다. 그런데도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들은 사랑이 부족하고 관심이 부족해서 심리적으로 이상이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오히려 너무 관심이 지나치고 사랑이 과해서 문제입니다. 과한 것은 부족한 것만도 못합니다. 아이가 너무 사랑과 관심을 과하게 받고 자라면 이기적이 되기 쉽고 배려심이 적어지기 쉽습니다. 자기 위주의 성격이 형성됩니다. 평범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육이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자녀들의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그 문제의 해답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일하게 예수님의 유년시절의 성장 모습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과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장문의 탄생기록과 짧지만 유일하게 예수님의 유년시절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됨의 모습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사람 복음서”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장하는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오늘 자녀들의 교육의 모델 내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교육적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

본문 40절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성장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이 모습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한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 더 복된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고 영적으로도 최상의 컨디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아 때는 보통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의 품안에서 살아가며 성장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심리적으로 아이의 모든 지성이나 영성이나 감성이나 성격형성이 대부분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 형성됩니다. 그때 고루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균형감각을 잃으면 아이에게는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 균형감각은 과하거나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랑이나 관심이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부족하면 균형이 깨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이 불균형 성장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을 보면 몸만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몸이 성장한 만큼 정신과 정서 그리고 감성과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해야 건강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건강한 성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들은 몸은 성장하는데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니까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균형입니다. 아이는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하고 영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아주 건강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년시절

예수님이 12살 때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은 유별납니다. 아이가 세살이 되면 율법에 따라 교육을 시작합니다. 다섯살 때 율법의 구절을 두루마리에 기록한 쉐마(Shema)와 할렐(Hallel)교육을 시작합니다. 

쉐마는 신명기 6장1-3절의 내용의 교육입니다. 그 내용은 숙지교육입니다. 외우게 하고 매일 읽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 자손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며 지키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쉐마교육입니다. 

그리고 할렐교육은 시편을 어머니가 가르치는 일입니다. 열 살이 되면 미쉬나교육 즉 마가복음 7장1-23절에 나오는 탈무드를 공부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비로소 언약의 아들이 됩니다. 그때부터 율법을 지키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종교적 공동체에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게 되어 절기 때마다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했는데 바로 13살부터 주어지는 이 의무를 이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규례에 의하면 성인 남자는 매년 3회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23장14-17절, 신명기16장16절) 포로 이후 디아스포라들 즉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여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이 전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에 사는 가난한 유대인들도 여행이 어려웠지만 유월절만은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절기는 유월절 명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때 요셉 부부는 나사렛 산골에서 살았는데 어린 12살 난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20km 즉 300리 길이고 3일을 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여 함께 줄지어 3일 길의 여행을 떠났을 것입니다. 당시는 그 먼 길 중간마다 강도의 출현이 많아서 단체로 함께 여행을 떠나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절기를 마치고 귀향하여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향에 거의 다 와서 보니까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 속에 있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그 부모들이 일행과 더불어 이야기 하면서 길을 가느라 아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챙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린 예수께서 당연히 사람들 틈에 끼어 따라 올 줄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사람들과 엉뚱한 일에 관심 쏟다 보면 예수를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예수를 잃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엉뚱한 일에 집중하다가 잃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취미에 깊이 빠집니다. 놀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잃게 되고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주일 예배에 빠졌습니다. 목사님이 전화해서 지난 주일에 왜 빠져느냐고 물으니 골프를 치러 갔다고 했습니다. 아니 집사가 주일날 예배는 안 드리고 골프를 치러 가느냐고 묻자 “예배시간에 눈을 감으면 눈앞에 골프공이 왔다 갔다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골프장에서 가서 눈앞에 교회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갔다”고 했습니다. 취미와 놀이에 빠지면 주일을 잃게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를 잃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를 잃고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3일 동안 찾아 헤매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사렛 시골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강도들이 많이 출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랍비들과 앉아서 대화하고 토론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12살짜리 어린이가 말입니다. 

47절을 보면 “예수는 지혜가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놀랍게”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엑시스탄토”라는 말입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놀랍다”는 뜻입니다.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라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두 놀라 자빠졌다”는 말입니다. 오죽했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신성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48절을 보면 부모가 예수께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네 부모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고 하자 49절에서 어린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50절을 보면 “그 부모가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의 집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깊은 속뜻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유년시절은 아주 영악했다는 말입니다. 

그 영악함 뒤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혜가 충만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영이 머리위에 함께 하였다는 조건입니다. 아주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자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과외공부를 더 시키려고 안달하지 말고 더 좋은 옷을 입히려 애쓰지 말고 이 3 가지가 충족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청년기

예수님의 성장과정도 아주 건실했습니다. 51절을 보면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청년기에도 가정의 자녀로서 본분에 충실하였음을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생들 4명과 어머니 마리아를 가업인 목수일로 가족들을 부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가복음6장3절) 

이 모습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설명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완전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아주 모범적인 모습입니다. 

52절을 보면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40절의 말씀을 다시 부연 설명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은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청소년 때에도 부모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종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원활하였지만 횡적으로 이웃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주 원활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청소년 때는 아주 건강하고 건전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성경적인 성장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린이 때에는 슬기롭고 지혜롭고 신실하고 순전합니다. 그런데 성장 후 청년기 때에는 왜곡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탈선하는 모습과 반항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환경이 좀 불우한 경우에는 탈선이 더 심합니다. 그것은 정신과 영이 병들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성장이 불균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환경이 불우하기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환경이 얼마나 불우하고 열악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청년기의 모습을 보면서 전인적인 성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나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아주 부드럽고 고루 성장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모델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장후 성숙한 역할

마침내 예수님이 30세에 이르러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되어 비로소 공생애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열심히 가르치고 고치고 전파하고 사명을 완수하고 계시대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만족하게 고백하고 마침내 부활하고 승천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 나이 33세에 그 큰 목적과 사명들을 다 이루시고 만족하게 고백하고 인생을 끝냅니다. 

우리는 그 보다 2배 3배 더 오래 살고도 아쉬움 뿐 이고 미련 뿐 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람들은 어렸을 때는 순전하고 건강하고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런데 청년 때에는 삐뚤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하고 인생을 얼룩지게 하다가 타락도 하고 목적을 상실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궤도를 이탈하여 그 인생이 심하게 얼룩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 가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두 배 세배를 살아도 할 일을 다 하기는커녕 여전히 후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의 모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균형 인생을 살았고 인격적으로 무장이 되었고 영적으로 수직관계가 강화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선용하여 짧은 시간 안에 할 일을 다 하고 33세에 일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양육하기가 그만큼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너무 억세어졌습니다. 양육비도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경쟁도 치열해 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힘드니까 외국으로 내 보냅니다. 외국으로 내 보내면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더 힘든 생활이 시작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교육은 너무 지식위주이고 입시위주이고 1등 위주입니다. 목적이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불행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성도 없고 영성도 없고 감성도 전무합니다. 그 결과 아주 메말라진 인생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삶의 지향점이나 목적이 하나님 기준으로 그리고 성경적 기준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성경적 기준으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의 미래의 길은 자연스럽게 그 궤도를 따라 가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 인생관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키가 자라가며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리위에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자녀 교육을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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