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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별력 없는 믿음과 순종 (신 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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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력 없는 믿음과 순종 (신 18:20-22)


한국의 개신교를 개혁하려는 분들이 실수한 것은 개혁 대상을 대형교회와 목회자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생각을 따른 것으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목회자와 평신도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대형교회 또 목사가 개혁되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입니다. 개혁의 대상은 대형교회도 아니고 소형교회도 아니고 모든 교회이고 목회자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니고 모든 성도들, 모든 신도들이 개혁의 대상입니다. 목회자들의 잘못이 크기는 합니다. 성도들을 잘못 가르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미국 속담에 탱고 춤을 추려면 파트너가 있어야 된다고 한 것처럼 성도들이 맞장구를 쳐주고 동조하고 좋아하고 또 심지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서로 뜻이 맞고 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잘못된 관행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개혁파가 아닙니다. 저는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신앙도 보수적이고 삶도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어떻게 이것을 바로잡아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고 이 개혁이 국가에 의한 개혁이 아닌 언론에 의한 개혁이 아닌 교회에 의한 교회의 개혁이어야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한 신앙의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개신교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정관을 만들어야 된다,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해야 된다, 목사의 권위를 견제할 수 있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제도적인 개혁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신학과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제도적인 개혁이 아닌 신학적인 개혁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돌아다니면서 무슨 운동을 한 게 아니고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책을 쓰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한 것처럼 이 젊은 독일 신학자가 쓴 글이 유럽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개신교가 바른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앙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한국 개신교회는 이미 말씀이 많다는 사실이에요. 말씀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 예배가 예식 중심이지만 개신교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까 말씀이 많아요. 말씀 중심의 예배입니다. 그럼 이제 와서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느냐. 이미 족한 게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말씀을 강조하다보니까 성경말씀의 권위보다는 설교자의 권위가 더 중요한 게 돼버렸어요. 이건 미묘한 현상입니다. 말씀을 강조하고 말씀이 빈번한데 정작 옳은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설교자의 권위, 설교자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옛날 LA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LA에 오셔서 수정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한인들을 위한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제가 친구들을 데리고 참석했는데 그 친구들은 그 목사님을 처음 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첫인상이 그 목사님은 성경을 별로 인용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는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설교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이런 지적을 했어요.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설교자들의 명성과 권위가 커지다보니까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의견과 개인의 사상과 경험을 가르치는 설교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맘먹습니다. 마틴 루터는 여기에 대해서 반발했어요. 그래서 오직 성경말씀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한국의 개신교회는 교회의 권위는 없고 설교자의 권위만이 있습니다. 목사들의 권위만 있습니다. 만일 마틴 루터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이 같은 현상에 대해서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목회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타 교회에 출석하는 어떤 여자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성도님이 친오빠에게 돈을 꾸었어요. 생활비에 도움이 되라고 친오빠가 돈을 빌려 주었는데 그 사실을 이 여자 분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그 빌린 돈의 십일조를 내라고 하더래요. 아니, 빌린 돈이 수입도 아니고 다시 돌려줘야 될 돈인데 거기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의 지론이 대박입니다. 당신이 십일조를 내면 오빠가 그 돈을 돌려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까. 

어이가 없지만 이것이 한국의 개신교의 현주소에요. 헌금이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까.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믿음을 빌미로 해서 사람의 탐욕을 강조하는, 탐욕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탐욕과 성도의 탐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행은 큰 교회 작은 교회 구별이 없고 목사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고 편만하게 깔려있는 현상이에요. 큰 교회는 오히려 세상의 이목을 받기 때문에 그들의 실수가 쉽게 노출되지만 작은 교회는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왜 개신교인들 숫자가 줄어드느냐. 왜 전도하기가 힘드냐를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교회를 제가 다녔다면 아마 저도 교회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가 좀 더 열심히 믿기만 한다면, 좀 더 뜨겁게 믿기만 한다면 이런 문제가 사라질 줄로 생각하는데 성경의 진리를 떠나간 뜨거움과 열심은 외부인에게는 광신으로 비쳐지고 오히려 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더 뜨겁게, 더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진리를 떠난 것이라면 그건 소리만 시끄러운 것이고 광신적이고 무의미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더 열심히 기도해서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력이라면 그만 껌뻑 죽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특별한 예언의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만 껌뻑 죽고 머리를 들이밀고 나를 위해서 예언해 주시와요 이렇게 합니다.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예언한다고 하면 호기심을 갖습니다. 

작년부터 어느 아프리카 목사님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예언을 한 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퍼지고 이목을 끌었지요. 이분이 예언하기를 한국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조만간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언을 옳게 한다는 증거로 과거에 자기가 아이티 지진도 예언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티가 회개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치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인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길래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를 그런 지진으로 치시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고 벌하는 분이고 사람의 실수를 빌미로 그렇게 벌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면 누군가는 잘못한 것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잘못 말했든 아니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잘못 이해했든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 멀쩡한 나라들은 죄가 없기 때문에 평강을 누리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지진도 없고 쓰나미도 없고 그런 나라들은 다 성자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일단 누가 예언을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꺼림칙하게 생각합니다. 무시하려니까 무섭고 그렇다고 듣기에는 꺼림칙하고.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할렐루야. 한국교회는 믿음과 순종을 강조했는데 분별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어요. 순종하라! 강조했어요. 믿어라! 강조했어요. 분별력은 가르치지 않았어요. 분별력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든가 분별력을 가르치면 성도들이 너무 똑똑해질 것으로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순종과 믿음만을 강요받은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결과적으로 우둔한 사람들이 돼버린 것입니다. 한국 백성이 결코 우둔한 사람들이 아닌데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우둔합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사리를 판단할 줄 모릅니다. 우둔한 성도들을 양산시켰어요.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고 작금의 교회 문제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될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 주변에도 예언을 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 그런 분들을 찾아다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유익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꾸어 온 돈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했던 그 목사님도 예언한다는 분이에요.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는 분입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사람이 신앙에 손해를 보는 것뿐만이 아니고 시험에 들고 그리고 교회에서 상처를 입고 주님을 떠나갈 수도 있는 그런 부작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언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마다 분변 내지는 분별이라는 말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시 말하면 한 사람만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라면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예언자들이 있어야 됩니다. 

적어도 두 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메시지를 확인해 주시지 아까 말씀드린 아프리카의 목사님처럼 배경도 알 수 없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단독으로 국가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하는 것을 그대로 듣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분을 대한민국에 소개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소개한 사람이 수상한 것입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식의 회개를 촉구하신다면 대한민국에도 기도하는 사람 많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다 건너뛰고 바다 건너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실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건 성경적인 원리를 모르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절에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분별력을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믿음과 순종만을 가르친 결과가 무엇이냐.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은혜를 사모하는데 미신적이에요. 또 열심을 강조하는데 기복적이에요. 그리고 말을 잘 듣는데 우둔합니다. 우둔한 성도.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 믿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온갖 거짓 선지자와 거짓 가르침이 스며들고 판을 쳐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아서 하시겠지. 하나님이 손을 보시겠지. 어떻게 되겠지. 우유부단한 성도들이 많고 우유부단한 것뿐만이 아니고 두려워합니다. 영력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마비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가 다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게 아니고 개중에는 방자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방자히 말한다는 말은 건방지게 교만하게 거리낌 없이 자기의 생각, 자기의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이지요. 

자기의 욕심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포장을 하고 또 육신에서 나오는 말을 하면서 영적인 것처럼 포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그런 문제가 있었어요. 신약 시대는 더 많아요.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가 더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은혜를 좀 받았다고 하는 사람, 소싯적에 기도 좀 해봤다는 사람치고 예언하지 않고 또 은사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통제하는 사람도 없고 바로잡아주는 사람도 없고 코치해 주는 사람도 없고 분별하는 사람도 없다보니까 한국교회는 은혜는 많이 받았는데 지뢰밭과 같아서 잘못 밟으면 터져버립니다. 

이것은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평신도와 목회자를 가리지 않고 편만하게 퍼져있는 현상이에요. 이것을 개혁해야 됩니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개혁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우리의 신앙의 기본부터 바로잡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을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두려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확신과 양심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벌 받지 않을까, 하나님에게 얻어맞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회의 변화가 더딘 이유는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무익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만일 목회자들이 이런 두려움을 방조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 행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방조하고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주의 종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해서 분별하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하게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믿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어요. 거짓은 두려움을 무기로 삼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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