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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간구 (약 5: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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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간구 (약 5:13-20) 
 
 
오늘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의인의 간구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3-20절은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가 일곱 번 나옵니다. 고난 중에 성도가 서로에 대해 원망하거나 맹세하는 대신 기도해야 함을 강조했지요. 인내와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서신이 시작되었는데 인내와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서신을 마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로부터 형제자매를 위한 기도까지 좀 더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 깨닫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서 살도록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루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고난당하는 자”의 대처 방식은 자신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심한 고난이나 오랜 질병에 직면해서도 언제나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할 것을 말했습니다. 요동치 않는 초연한 평정심 속에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도록 가르쳤지요. 반면 성경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가르칩니다(13a). 성도에게는 고난을 극복하는 것보다 고난 중에 하나님과 신뢰관계를 증진하는 것이 더 큰 목표입니다.

고난 극복에 목표를 두면 극복 방법과 강인한 의지가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은 요식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 증진 과정에 목표를 두면 고난 중에도 기도할 것이고, 고난이 지나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을 때 역시 “찬송”할 것입니다(13b). 기도할수록 자기가 부인되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이고, 기도를 간절히 했을지라도 자기 의가 생기는 대신 마음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이로써 기도는 성도로 하여금 그분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게 합니다.

스토아적인 생각은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연약한 모습은 최대한 감추고 강한 모습만을 드러내려 할 것이며, 최소한 강한척이라도 할 것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고 그 후에야 교회에 다시 나가려는 생각을 가진 성도들의 생각이 이처럼 스토아 적입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스스로 해결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14a).

병은 어려운 상황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어려움을 안고 혼자 탄식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알아서 도와줄 것을 기대하다가 서운해 할 일이 아닙니다. 말씀은 병든 자가 먼저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명합니다. 이때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를 청하라고 하지 않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 했지요. 이렇게 하면 어려움이 해소되었을 때 특정한 개인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않고 교회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의 대표들에게 부탁함으로써 한 성도의 사적인 어려움은 교회의 공적인 기도제목이 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성도 간에 관계성이 증진됩니다.

장로들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의 요청이 있을 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14b) 책임이 있습니다. 올리브유는 1세기 당시에 포도주와 함께 치료제로 사용되었습니다(막 6:13; 눅 10:34).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은 치료제나 치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15절에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낫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만 말하지 않고 기름을 바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적절한 치료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면 신비주의가 되거나 합리주의가 됩니다.

15절의 “믿음의 기도”는 ‘병이 나을 줄 믿고 기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확신 중에 기도해도 회복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 해석은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a)라는 약속을 헛되게 만듭니다. 앞뒤 구절은 이 구절의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붙드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로 자신의 책임에 태만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의 실례는 몇 구절 뒤 엘리야의 기도에서 좀 더 자세히 소개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갈 정도였습니다(행 19:11-12).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로 세 번 기도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시는 응답만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거두지 않으셨음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약한 것들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고후 12:7-9).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말씀이 바울의 경우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의 ‘구원’(소세이)은 포로가 해방되거나 병자가 회복되는 등 힘겨운 상황에서 건짐 받는다는 넓은 의미입니다. 크게 기뻐하며 자랑한 바울은 근심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문제 자체를 해결해 주시는 것도 구원이지만, 문제가 있어도 더 이상 힘겨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거룩하신 주권에 따라 어떤 성도는 연약한 채로 두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바꿔주시지 않는다면 힘겨운 상황조차 기뻐할 수 있도록 성숙케 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병자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4장 3절에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건강하게 되어 더욱 세상과 친해지려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도 그분 백성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믿은 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기도할지라도 효력이 없겠지요. 반면 믿음의 기도는 육체의 병을 넘어 죄로부터의 구원까지 효력을 미칩니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b).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지는 않지만 때로 죄로 말미암은 병이 있습니다(마 9:2). 그런 병이라면 병 나음이 죄 사함의 증거까지 되겠지요.

교회가 함께 기도를 드릴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a). 가족 중 한 사람에게 발생한 심각한 사고는 그동안 있었던 서로 간의 마찰이나 갈등을 내려놓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더 아껴주고 사랑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게 되기도 하지요. 이처럼 공동체 내에 발생한 병이나 어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나 성도 상호간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과 성도와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b)는 말씀은 어떻게 기도하느냐 얼마나 기도하느냐보다 누가 기도하느냐에 중요성을 둡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의인은 소위 영성이 강한 특별한 엘리트를 뜻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가진 자나 장로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에 해당하는 믿음의 기도를 드린 엘리야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기적과 능력의 사람으로 기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그를 영적 엘리트로 생각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때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습니다(17-18). 엘리야의 기도는 자기 소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그 시대를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에 따라 비가 멈추고 내린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6:33-17:1; 18:1). 엘리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나라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는 시대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도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850명의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와 혈혈단신으로 싸워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았기에 금세 외로움과 우울함에 사로잡혀 죽기를 간구하기도 했습니다(왕상 18:19, 36-38; 19:4).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했던 그 시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엘리야는 다음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리에서 떠난 자를 … 돌아서게”(19)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합니다. 성경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20)이라 합니다. 다니엘서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b)고 했는데, 엘리야의 신앙이 이처럼 비취고 있습니다. 그의 확고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주저했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왕상 18:21, 39-40).

성경은 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이킬 책임을 교회에 부가합니다.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개인주의는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 연약한 자뿐만 아니라 진리를 떠난 자에 대해서도 정죄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자를 돌이키기 위해서는 교회는 엘리야처럼 먼저 자신이 진리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않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전투적 삶을 통해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 삶의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시대의 죄악을 생각하며 의인의 간구를 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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