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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우리의 참 스승 - 예수 그리스도 (요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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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참 스승 - 예수 그리스도 (요 10:11-18) 


올해로 스승의 날이 30번째를 맞이했습니다. 과거에는 '스승'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감히 밟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스승이라는 말이 사라져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런 착잡한 심정을 가지고 저도 한 시대를 교육을 담당하는 지도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키며 특히 교회에 수고하시는 교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평생 살다가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10명의 진정한 친구, 100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다.” 존경하는 스승이 있습니까? 일생의 영원한 멘토가 될 스승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가 열린 사람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삶의 모범이 생깁니다. 생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넘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좋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뒤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허준 뒤에는 유의태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여호수아 뒤에는 모세가 있었습니다. 다윗 뒤에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엘리사 뒤에는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스승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의 삶 전체를 바꾸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어떻하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스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으며 우리 역시 그런 스승의 모습을 닮아가며 또한 그런 스승을 존경하는 자리에 서서 일선에서 고생하시는 스승을 존경하고 따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은 정말 무엇이 스승의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매우 목가적이고도 낭만적인 비유를 드셨습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라고 하면 당시 목축업을 하면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정감 어린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면서 삯을 받고 남의 양을 치는 삯꾼 목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삯꾼 목자가 악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삯꾼 목자는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진정 양 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양을 심하게 몰수도 있고, 또 이리나 짐승이 덤비면 양보다 자기 생명을 위해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일하는 진실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실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아닙니까?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십대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양 떼를 치면서 겪었던 일을 사울 왕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아버지의 양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목자 생활을 했는지를 상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삼상 17:34-35). 자기가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힘없이 새끼를 움켜서 도망가면 목숨을 걸고 쫓아가서 새끼를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곰이 양 새끼를 물고 가면 쫓아가서 곰과 격투를 하여 새끼를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껴서는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할 때에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위해서 싸우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11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계십니다. 

마치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시면서 마지막 후렴으로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를 거듭 반복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말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주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절대 가볍게 듣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자기 생명보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가?’하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벌였습니다. 체벌 교사의 처벌 요구했는데 학교 당국이 이를 거절하고 주동 학생들을 징계하려고 해서 수업을 거부한 것입니다. 운동장에 모였다던 학생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교사들은 슬슬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유독 나이 지긋한 선생님만 남아서 학생들을 만나 호통을 칩니다.?야! 이놈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썩 나가지 못해!?그러자 흥분한 학생 몇이 선생님을 구타합니다. 선생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구타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손으로 다른 데를 가리지 않고 끝끝내 눈만 가리고 있는 겁니다. 

사태가 겨우 수습되자 학생들은 큰일 났다 싶어 그 선생님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빕니다. 죽을 죄를 지었노라고. 선생님은 웃으면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괜찮다며 격려합니다. 그러자 안심이 된 학생 들 중에 하나가 질문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눈을 가리 계셨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 나를 때리는 학생을 보고 싶지 않아서 ... 나도 인간인지라 두고두고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그랬지.? 그 말씀을 들은 학생들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요즘 가슴 아픈 것이 하나있습니다. 학교 교사들이 노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입니다. 왜 교사가 노동자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권익을 유지해야합니까?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스승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픔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스승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 옵니다. 

여러분, 헬렌 켈러(Hellen A. Keller)를 잘 아시죠. 그런데 그의 배후에 앤 설리번(Anne Sullivan)이 있고, 또 그 배후에는 로라(Laura)라는 老 간호사가 있습니다. 사랑의 릴레이가 놀라운 기적을 연출한 겁니다.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언어 삼중 장애인이죠. 그런데 장애인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난을 극복한 위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은 그를 키워준 설리번 선생입니다. 거의 50년간 옆에 붙어서 가르치고 도와준 분입니다. 대단한 사랑이죠. 그런데 설리번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로라의 사랑과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앤 설리번입니다. 그 소녀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 소녀는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날마다 자살을 기도하고, 괴성을 지르고 ... 결국 회복 불능의 판정을 받고, 지하 독방에 격리 수용됩니다. 보호소 측에서는 치료도 중단시켰습니다. 그런데 老 간호사 로라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합니다. 특별한 치료보다 그냥 친구가 되어 날마다 먹을 것을 들고 가서 책을 읽어 주고 기도해 줍니다. 처음에는 담벼락처럼 무반응이었습니다.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콜릿 한 개가 없어집니다. 앤이 집어먹은 겁니다. 용기를 얻은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 주고 기도해 줍니다.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이야기를 하더니, 2년 만에 정상인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 후 맹아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최우등으로 졸업합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고 눈도 뜨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광고 기사를 보게 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를 돌 볼 보모를 초빙합니다!? 앤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그 아이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 낸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지 않습니까?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적당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양들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또 27절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양이 몇 마리인지 아는 정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양이 남의 양이고 내 양인가를 알거나, 나이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 혹은 새끼를 배었는지 안 배었는지를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삯꾼 목자도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안다’고 하실 때는 양들의 처지에서 양들을 생각해 준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들의 처지에 서서 양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의 그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준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주님은 목자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나 하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자시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이 처하신 형편이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자나 곰과 싸우다가 잘못해서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도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마음에도 없는 죽음을 당하는 그런 목자도 아닙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버리지 않을 권세도 있지만 양들을 위해서 스스로 그 목숨을 내놓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지 의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외로운 생각이 들면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를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아신다는 말은 도와주시겠다는 약속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린 자녀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아빠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알았어.” 그래도 무슨 말을 또 하면 “알았다니까”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와주겠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직장을 잃고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도와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혼도 해야 됩니다, 주님.” “알았다니까.” “앞으로 내 진로는 이렇게 택했으면 좋겠는데 벌써 시험에 다섯 번이나 떨어졌어요.” “글세 알았다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형편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절망이 아닙니다. 슬퍼하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나를 알아주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어제 우리 교회 부목사님으로 계시다가 개척 나가신 송종호 목사님께서 스승의 날이라고 선물과 거기에 편지 한 장을 보내셨습니다. 

영적인 아버지요. 목회의 스승이신 목사님께!! 

목사님! 평안하시죠?/ 목사님을 생각하면 평온한 고향이 떠오릅니다./ 때로는 도전이 찾아오기도 하고요/특히 제가 목회를 감당하며 /목사님께서 철야 예배 시간에 들려 주셨던 말씀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 말씀은요?/여호수아 14장 말씀이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갈렙에 대해서요. /그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갈렙은 광야의 모든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마음에 쌓아 놓았다고요/ 그리고 나중 결정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길을 선택했다고요/ 그래서 저도 목회의 모든 과정 속에서/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길을 선택하려 합니다./ 목사님! 앞으로도 목사님께 배운데로 열심히 목회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가르침들이 하나도 헛되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송종호 목사 드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스승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 그러나 또한 이것처럼 보람이 있는 자리도 드물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역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동의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학교에서 땀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또 경로대학이나, 실로암 대학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사회 각지에서 교사로서 교수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스승!! 그들은 해산의 수고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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