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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모스서 서론 (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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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아모스 1:1-2
제목 : 아모스서 서론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서론

아모스서는 열두 권의 소선지서 가운데 세 번째 책입니다. 오늘부터 아모스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 가운데 제일 안 읽는 책이 뭐냐면 레위기입니다. 그다음으로 안 읽는 책이 예언서입니다. 예언서를 읽지 않는 이유는 어렵기도 하고 성경을 읽으면 위로를 받아야 되는데 예언서는 늘 심판의 메시지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성경 전체 삼 분의 일은 예언서입니다. 우리가 예언서를 안 읽으면 성경의 삼 분의 일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서에 재미를 붙이고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예언서가 어렵고 심판의 메시지만 있기 때문에 읽지 않겠다고 하면 우리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느냐? 이것이 참 중요한 질문인데 누가복음 24장 27절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르친 사건을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 옆에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모세오경에도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있고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인데 그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니까 두 제자들이 재미가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고 성경을 더 풀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서에 재미를 붙이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읽어야 됩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신약시대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여기에 초점을 가지고 읽다 보면 예언서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후반에 보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멋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정신이라는 뜻인데 주어하고 보어하고는 내용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어도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the spirit of prophecy is the testimony of Jesus" 예언의 정신은 예수를 증거한다는 뜻이 됩니다. 참된 예언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언서를 생각하면 666, 777, 7년 환란, 천년왕국, 적그리스도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언서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을 보면 예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다.”라고 나와 있어서 예언의 해석 원리를 말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언은 사사로이 푼 것이 아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은 예언의 해석 원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예언은 사람이 사사로이 풀거나 사사로이 연구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예언자가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공부하고 은혜를 입어야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이라고 할 때는 10년 혹은 100년 뒤에 뭐가 어떻게 된다는 미래적인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언이 미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예언의 특징은 아닙니다. 성경 예언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의 심판은 왜 오는 것인가? 

이처럼 예언의 중심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 4:12) 예언서를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공부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아모스서가 소선지서이지만 아홉 장에 걸친 비교적 방대한 책이기 때문에 오늘은 서론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말씀하시는 주체는 누구신가?

아모스 1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모스 1장 6절, 9절, 11절, 13절, 2장 1절 계속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입니다. 아모스서는 아모스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엇을 연구해서 발표하거나 사사로운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모스는 단지 도구가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Ⅱ.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도구”는 누구인가?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암 1:1) 묵시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귀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시를 주실 때 청각도 사용하시고 시각도 사용하셔서 계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사용했느냐?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람을 소개할 때는 보통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소개를 합니다. 예를 들어 브두엘의 아들 요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과 같이 소개하는데 아모스는 그의 고향과 직업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모스의 아버지가 이름을 말해봐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그의 고향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남방 유다에 있는 마을입니다. 

드고아라고 하는 동네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많았습니다. 다윗 왕의 이야기에서도 요압 장군이 다윗의 아
들 압살롬을 데리고 올 때 드고아의 여인을 함께 데려와 다윗 왕에게 말하도록 하여 다윗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드고아 사람들은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였습니다. 양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암 7:14) 아모스는 뽕나무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목자이고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도 많고 선지자도 많았는데 왜 평범한 농부를 선지자로 불렀느냐? 그것은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자격이 없는 가짜 제사장이었고 선지자들도 가짜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31절에 보면 여로보암 1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단과 벧엘 두 군데에 두고 산당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짐승 몇 마리만 갖다 주면 무조건 제사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모두 순 가짜들이었습니다. 여로보암 1세, 2세 시대 모두 그랬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역사상 계속 되었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목사라고 해서 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화란에서 목사이면서 수상까지 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5살 되던 1863년에 화란의 한 시골에 있는 베이스트라고 하는 동네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계속하는데 한 부인이 몇 주간 교회에 나오더니 갑자기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심방을 갔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어보니까 이 부인이 목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당신은 복음을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설교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머리가 뛰어나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25살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큰 충격를 받았고 자기의 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공부를 계속해서 결국 개혁주의 신학의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화란의 수상까지 되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argeon) 목사님은 15살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17살 때부터 목회를 시작해서 신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에게 신학을 배웠느냐면 그가 15살에 캠브리지 뉴마켓 마을의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할 때 학교 주방장이었던 메리 킹이라는 여사가 있었습니다. 

메리 킹 여사는 가스펠 스탠다드라고 하는 잡지를 구독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교리를 믿으며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나이 든 부인이 15살짜리 어린 스펄전과 대화하면서 스펄전이 은혜의 교리를 깨우치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설교집을 보게 되면 메리 킹 여사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은 어부나 세리 같은 사람들을 사도로 택하셨습니까? 그 사도들 중에 보면 어디 명함 찍을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부분이 어부이거나 세리였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창녀 출신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을 택하여 사도로 쓰셨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을 하나님께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어둠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여러분 평신도라 할지라도 설교하는 큰 교회 목사보다 더 진리를 밝히 볼 수 있습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진리를 모르고 큰 교회 목사라고 해서 진리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주는 학위만으로 그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보증서가 될 수 없습니다. 또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만 가지고 진리의 보증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운동한다고 귀신 잘 내쫓는다고 병을 잘 고친다고 그것이 진리의 보증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선지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진리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하나님께서 가르치실만한 Spirit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진리를 배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공부한 것만 가지고 고집을 피우며 하나님께 배울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항상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배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나님께 배우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5)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사람이 말 한마디라도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좋은 능력이 그 사람 영혼 안에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 한마디라도 항상 불평하고 성경에 대해 비판하는 소리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은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배우시기 바랍니다. 


Ⅲ.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암 1:1) 그 시대에는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이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왜 여로보암이 요아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느냐면 여로보암이 두 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1세이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가 예언하던 당시는 여로보암 2세인 것입니다. 그때 지진이 났습니다.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슥 14: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수백 년이 지나도 웃시야와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일어난 지진을 유다 백성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진이 언제 일어났냐면 어떤 사람은 B.C. 760년에 일어났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B.C. 755년에 일어났다고도 합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B.C. 750년 중반쯤에 일어났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남 왕국 유다에 살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쪽에 단도 있고 벧엘도 있고 금송아지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로부터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에서부터 북쪽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대상은 그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만약 예언서가 그 시대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한다면 성경에서 빼버려야 됩니다. 읽어봐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모스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성경에 포함시켰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서를 읽고 들을 때 옆집 아저씨가 들으면 좋겠다거나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들으면 유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Ⅳ. 아모스가 살던 시대상황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묵시의 말씀을 주셨을까요? 아모스가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어떠해서 아모스라는 목자를 들어 이렇게 말씀을 하셨느냐?
 
첫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는 경제적인 부유가 특징이었습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암 6:4-6) 

상아로 침대를 만들고 포도주를 대접에 부어마셨습니다. 그만큼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국가적인 환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암 4:1) 여자들도 술을 잘 마셨습니다. 남편에게 술을 가져오라하고 술에 취하면 상아로 만든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나 웃시야 시대의 경제적인 번영은 자생력 있는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와 같은 주변 국가들이 세력이 약화되어 누리게 된 번영이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 것입니다. 자생력이 있으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만 봐도 자생력 있는 번영이 아닙니다. 무역 의존도가 너무 높습니다. 그러니까 중동에서 기름값이 조금만 올라도 미국은 감기에 걸리고 우리는 조류독감에 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살게 해주신 것이지 우리 힘으로 자생력 있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국방과 안보에 대해서도 안정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암 6:1)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모두 국방과 안보에 대해서 안일했습니다. 그러다 30년 후에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망해버린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은 사치스러웠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특권층은 여름과 겨울을 나눠서 궁을 짓고 날이 더우면 시원한 곳에 가서 살고 추우면 따뜻한 곳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상아로 침대를 만들어 자고 포도주를 대접에 부어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는 등(암 3:15, 6:4, 6:6) 부자들은 이렇게 사치스럽게 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암 8:6) 가난한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지 신 한 켤레를 주면 그 사람을 노예로 샀습니다.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백성이 부도덕했습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돈이 있으니까 윤리가 극도로 타락한 것입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암 5: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암 2:7) 아버지가 간 창녀에게 아들도 갑니다. 이러니 무슨 윤리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섯째, 이런 문제가 많이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열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안 드렸느냐? 아닙니다. 열심히 드렸습니다. 단과 벧엘에 가서 열심히 드렸지만 그들의 예배는 타락된 예배였고 부패한 예배였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암 5:21-22) 

번제, 소제, 화목제로 짐승들을 잔뜩 가져다드려도 하나님께서 안 받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배를 안 받으시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드리면서 밖에 나가서는 극악한 죄를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삶은 아주 부도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안 받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암 4:4) 

우리가 주일날 와서 한번 예배드리고 이번 주 액땜했다 생각하고 나가서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일날 드리는 예배도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장소도 잘못되었고 제사장도 가짜고 절기도 엉터리 절기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예배를 안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경건으로 포장된 이방 종교에 불과했습니다. 

결론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어떤 것이라고 추측이 되십니까? 2-3장을 안 읽어봐도 어떤 것이라고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얘들아 잘한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다. 내가 조금 섭섭한 것이 있지만 앞으로도 잘해라. 내가 너희를 계속 사랑한다.” 이런 메시지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아모스 1장 2절입니다.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 1:2) 
 
여호와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부르짖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roar” 사자가 포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포효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자는 먹이를 잡았을 때 포효합니까? 잡기 전에 포효합니까? 잡기 전에 포효하면 먹잇감이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먹이를 잡으면 포효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이를 잡아서 식사를 해야 하니까 근처에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암 3:4)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사자처럼 부르짖는다는 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움켜쥐고 하나님께서 잡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자가 발톱으로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잡수시려고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잡수시면 목자의 초장도 갈멜산도 다 물이 마르게 될 것입니다. 목자의 초장은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한 골란고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암소들이 많고 물이 풍부하며 비옥한 곳입니다. 갈멜산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물이 없어 말라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유와 재물을 싹 거두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거짓되게 드리고 삶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로보암 시대와 정말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부패하여 타락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하며 예배를 드리고 나가서 죄나 짓고 살면 우리나라의 안전과 경제적인 부유가 계속 지켜지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됩니다. 첫째, 예배드리는 자세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삶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있으면 오늘로 정리하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오늘 아모스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모스가 예언한 것이 주전 755년이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왕에게 망한 것이 주전 721년입니다. 불과 34년 만에 망해버렸습니다. 34년 동안 여섯 왕이 계속 바뀌다가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지상에서 사라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아모스가 우리에게 주는 큰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해야 되겠고 예배도 바르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우리 대한민국이 계속 번영하는 나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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