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고전 7:1-17)

첨부 1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고전 7:1-17)


제가 2년 전 이 '가정의 달' 5월의 어느 주일에 마태복음 19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신자의 결혼관'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신자 부부는 결혼한 이후에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부부 간의 갈등'이 생긴다 해도 그 때문에 이혼을 할 수는 없고 끝까지 둘이 함께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해야만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하여 서로를 향한 존경과 애정이 더 깊어지고 그 결과 세월이 갈수록 더 행복해지는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례를 하게 될 예비신랑신부들을 결혼식 한 주일 전에 미리 만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이 설교를 혹시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면 십중팔구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얼굴을 붉히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 곁에 함께 앉아 계시는 부모님들은 대부분 다 그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지금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미혼의 청년들은 결혼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그저 어서 빨리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장미빛 꿈'들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결혼 후의 갈등이나 위기'라는 것이 실감나기 어려울 것이고, 반면에 이미 결혼을 한 부부들은 크든지 작든지 그런 상황을 다 한번쯤은 겪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전환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신자가 되는 순간이지만, 육신적으로만 말할 때에 인생의 대표적인 전환점은 역시 '독신' 생활을 청산하는 '결혼'일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결혼' 이후에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이혼'으로서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그 빈도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아니면 아직은 독신으로 지낼 것인가?'라는 문제만 있었는데, 이제는 결혼 후에도 '내가 이 사람과 이혼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같이 살 것인가?'라는 고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독신이냐 결혼이냐?'라는 선택에 대해서 성경은 '결혼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독신도 상관없다.'라고 대답합니다.

1절과 2절에 "1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기록했습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이라는 것은, 이전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질문한 것들 중에 하나가 '독신' 생활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에 대하여 대답을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말은 물론 바울이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시는 성도덕이 극도로 타락한 사회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면서 전적으로 주의 일에 헌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지금 바울에게 자문을 구해 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그런 선한 목적으로 평생 독신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격려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런 독신 생활에 따르는 위험을 경고해 줍니다. 
여기 '음행의 연고로 남녀가 각각 결혼하는 것이 좋다.'라고 한 것은 '결혼하는 목적이 다른 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때 가장 큰 위험이 바로 음행의 죄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중에 9절에 나오는 말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다른 음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으니까 결혼해도 괜찮다.'라고 부득이 허락해 주는 말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서 독신 생활을 하려는 신자들을 향하여 '나처럼 주님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려는 목적으로 독신 생활을 지키려 하는 남자는 아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러다가 스스로 불같이 타오르는 정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빠질 위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무리하느니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 5절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한 부부의 합당한 성생활에 대하여 교훈하기를 "3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 그 배우자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은 부부가 서로에게 동동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인데, 여기에는 특히 '순결한 성생활'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이어서 '남편과 아내가 스스로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 배우자가 주장한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영적으로 신자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셔서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었지만, 육신적으로 말할 때에 결혼한 부부의 육체는 오직 '배우자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란 서로가 '상대 배우자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내 몸은 오직 내 남편, 내 아내에게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순결하게 지켜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은 신실한 신자 부부들이 가지는 너무나도 고상한 자세인 것입니다.

"서로 분방(分房)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부부생활을 합당한 사유 없이 단절시키면서 '별거'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기도할 제목이 있을 경우에도 부부 간에 서로 "합의"가 이루어진 하에서 "얼마동안"만 분방하고 곧 "다시 합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욕 그 자체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욕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그것을 건전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욕을 무리하게 억제하면서까지 독방이나 독신을 고집하다가 그만 "절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초할 필요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6절부터 9절까지 말씀에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는 말은 독신을 장려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나처럼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울의 '개인적 소원'입니다.
이 말에 절대로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 문단 서두에서 '내가 이 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권면이지 사도로서의 명령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단서까지 붙여 두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극단적 성적 타락에 빠진 헬라 사회에서는 그 반작용으로 금욕주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런 금욕주의자들은 '성적 타락의 조류에 반대하는 것'을 '결혼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했는데, 고린도교회 안에도 그런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교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독신 생활은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의 문제이며 개인의 취사선택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법으로 제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독신 생활'을 법적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을 무슨 자랑처럼 여기는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처럼 '강요된 독신'의 세계에서 비일비재하게 그리고 공공연히 벌어지는 음행의 범죄 행위들은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을 스스로 "절제할 수 없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한 독신 생활'을 하는 것처럼 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명한 교부(敎父) 오리겐은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도 바울처럼 '독신의 은사'를 받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절제할 수 없었다면 그냥 결혼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독신과 금욕이 좋다는 착각에 빠져서,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육신을 자해하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은 '서로 돕는 배필'과 결혼을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받은 은사와 처한 상황에 따라 독신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무조건 '결혼'하기 위해서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둘 다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참된 신자에게는 독신 생활이나 결혼 중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사는 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극단적인 예외는 있지만 이혼은 원칙적으로 불가하다.'고 대답합니다.

10절과 11절 말씀에 "10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독신 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것은 권면이지 명령은 아니다.'라고 단서를 붙였지만, 여기서는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에게 이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즉 '이혼은 불가하다.'라는 것이 간단명료한 '주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때부터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결혼 제도'를 근본적으로 확정해 놓으셨으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이혼의 불가함'을 명백히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혼 불가'라는 원칙에도 '예외'는 있음을 이어지는 말씀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12절 이하 16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2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어떤 사람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을 때에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본인은 신자가 되었지만 그 배우자는 여전히 불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부가 짝믿음이 된 경우에는 이혼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 사도 바울이 대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새로운 단서가 여기에 붙어 있는데 이것은 이 문제가 무슨 '흑백으로 나누어지는 진리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개인 선택의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불신 배우자라 할지라도 그가 신자 배우자와 결혼 관계를 지키고 싶어 하면 신자 배우자 쪽에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내 쪽의 신앙이 좋다고 해서 예수 믿지 않는 남편도 그 덕분에 저절로 거룩해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믿는 배우자가 결혼 생활을 끝까지 지켜 가면, 나중에 자신의 신앙생활로써 불신 상대방을 감화감동시켜 전도하게 될 가망성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나중에 16절에서 재차 밝힌 대로 '신자 아내가 불신 남편을 구원하게 될지, 혹은 신자 남편이 불신 아내를 구원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14절 하반절의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는 말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불신 배우자를 어찌하든지 전도해서 함께 믿게 해야 자식들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키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이혼을 해서 자녀를 상대방에게 빼앗기게 될 경우에는 그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시키지 못하게 되어 결국 "깨끗지 못한" 즉 불신 상태로 남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자의 영혼 구원'과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이혼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15절 상반절에 가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방 불신 배우자 쪽에서 끝까지 이혼을 요구해 오면 이혼을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구속을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 즉 더 이상 결혼 관계를 지속해야만 할 의무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5절 하반절의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는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16절에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앞의 15절 상반절과 직결되는 문맥입니다.
즉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요청하면 해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화평 중에 너희를 부르셨으니, 너희도 네 불신 배우자와 화해하면 혹 그를 구원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 대신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평화롭게 살도록 불러 주셨으니, 그처럼 불신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에 억지로 속박되어 고통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불신 배우자의 경우에도 전도와 자녀 신앙 교육 차원에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 불가피한 경우에는 아무 죄책감을 가지지 말고 이혼해도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9장 9절에 보면, 배우자가 간음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순결을 배반당한 쪽에서 도저히 '평화롭게 살 수 없는'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런 결혼 관계 역시 더 이상 "구속 받을 것이 없는" 것이며, 이것은 남편의 폭행으로 인하여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 아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역시 불신 배우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용서하고 결혼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For Kids' Sake"(애들을 생각해서라도)라는 제목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다가 자기 옆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어떤 초등학생 아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 아이는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주중에는 엄마 집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주말이 되면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혼한 부모가 자녀 양육권을 두고 법정에서 합의를 보아야만 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게 된 저자는 "이혼을 하게 되면 정신적, 현실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다. 정말 '애들을 생각해서라도'(for kids' sake) 이혼만은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글을 썼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파경의 위기를 맞이한 부부가 그처럼 오로지 '자녀 때문에라도' 이혼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가면,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그때 이혼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혼 이후에 어떤 갈등이나 위기가 생겼을 때에 소위 '각자의 행복을 다시 찾자.'는 핑계로 이혼을 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법을 끝까지 지키는 부부에게 '훨씬 더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의 불신앙이나 간음 등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혼이 허락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신앙적으로 화합하는 길을 찾고 인간적으로 용서함으로써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 이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부부와 자녀와 가정의 진정한 행복을 끝까지 지키고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독신과 결혼', '결혼과 이혼'의 문제에 대하여 이런 대답을 들려 준 후에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씀을 이하 24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내용까지 연결해서 간단히 요약하자면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뜻입니다.
기독신자로 소명 받은 시점에 본인의 혈통이 "유대인"이었든지 "헬라인"이었든지, 그 신분이 "종"이었든지 "자유인"이었든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자기가 부름 받은 그 모습이 그대로 확실히 "주께 속한" 소유가 되는 것이며, 그 부름 받은 순간부터 변치 않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백성이 되는 데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당시에 혈통이나 사회 신분이 어떠했는지가 아무 상관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현재 독신이나 결혼이나 혹 이혼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 결정적인 요건이 될 수는 없다고 결론적으로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사니까 뭔가 잘못된 인생이구나.' -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배우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 그런 핑계도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혼 경력이 있으니까 평생 낙인찍힌 불구 신자이다.' - 결코 그런 자학에 빠져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받은 택자로 불러 주신 것이 분명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도록 정해 주신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여러분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아직 불신자였을 때에 각각 이혼 경력을 가진 남녀가 만나서 재혼한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자가 된 후에 남은 평생을 둘이 함께 복음 전도자로 섬기고자 하는 소명을 받고 미국의 어느 신학교를 찾아가서 함께 입학 신청을 했는데, 그들에게 이혼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습니다.
  
그때 그 부부는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에 그 죄 역시 깨끗하게 용서받은 줄로 믿고 있습니다. 비록 이 신학교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미 받아 주고 계실 줄로 확신합니다."라고 말하고 그 학교를 떠났다고 합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모든 문제의 정답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독신의 은사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 독신 생활 중에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면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하도록 짝지어 주셨으면 바로 그 결혼 생활의 순결과 사랑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며 살 수 있습니다.
혹 과거에 피치 못할 이혼의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혹 합당치 못한 이혼을 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후에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것을 보면, 이미 하나님의 위로와 용서를 누리며 완전한 새 생활을 누리고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리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생명'이 된 까닭에 더 이상 '사람에게 매여 있는 종' 즉 인간관계에 의하여 종속되거나 사회적 위치에 의하여 가치가 판단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독신으로 있는 것도 '주께서 부르신' 생활이며 남편이나 아내 역시 '주께서 주신 평생의 반려자'임을 기억하면서, 현재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든지 간에 오직 '주께 속한 자유자'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