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인 아이 (말 4:5-6, 고전 13:11)

첨부 1


성인 아이 (말 4:5-6, 고전 13:11)          


I. 아버지 마음과 종말(말4:5-6)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때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떤 성현군자도 가르쳐 주지 못했던 진리였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도, 심지어 구약성경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이십니다.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 책이 말라기서입니다. 제일 마지막 장은 말라기 4장입니다. 

제일 마지막 절은 말라기 4장 6절입니다. 구약 성경 제일 마지막 단어는 우리말 성경엔 “하노라 하시니라”로 되어 있지만 구약 원문에서는 헤렘(cherem)-“저주”라는 단어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6) 

이 말씀이 구약 성경 제일 마지막 예언의 말씀입니다. 

말라기 4장의 배경은 종말입니다.
1절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5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
종말시대 중에서도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분이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 즉 재림으로 끝이 납니다. 기독교 역사는 직선적입니다.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재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과 한 가족이 되어 친밀한 교제와 삶을 누리면 큰복을 받습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 이일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녀가 되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함을 모르고 살도록 합니다. 
이 땅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깨뜨리고 상처나게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운 아버지라고 속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선생님이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 아버지 마음이 없이 사장님이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목사가 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이 없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 아버지 마음이 없이 목자가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반면 -

․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를 많이 만들어 가는 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목회자와 리더가 많아지는 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엔 불신자, 새신자, 상처입은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 인생의 짐이 무거운 사람들... 
  그 어떤 사람이 와도 하나님의 가족안에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힘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래서 복은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요 
저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구약 마지막 예언의 말씀을 보십시다.“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6)

II. 육신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리더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삶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 땅의 아버지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육신의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데 방해거리가 됩니다. 내 육신의 아버지라는 창문을 통해 하나님을 볼때 하나님이 올바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의 성품과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서 내게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이 제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손실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또 제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늘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알고 한없이 감사를 했습니다. 
또 제 주변에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잘못된 아버지를 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엄격한 유교적 배경에서 자란 우리세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갑자기 엄숙해지고 무릎을 꿇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하면 늘 회초리를 든 아버지가 연상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공동체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교회에 충성을 하는 것도 은혜에 감사 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하는 율법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 “너 자꾸 그러면 갖다 버린다”는 부모의 협박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린시절 어둡고 무서운 바깥에 혼자 버림받아 서 있던 기억이 있습니까? 아마 그 상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데 커다란 방해의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그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가정과 사람이 다양하듯 상처 또한 각양 각색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얻고 싶다면 그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고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내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나를 보는 것이 즐거워 기뻐하시며 노래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뻐하다 못해 춤을 추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스바냐 선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노래하고 춤추시는 아버지! 상상이 되십니까?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한번도 “아들아, 사랑한다, 딸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날마다 나를 향해 “사랑한다, 사랑스럽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 상처를 치료받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는 복을 모두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을 느낍니다. 어디를 가도 받지 못할 이해를, 아버지 앞에만 가면 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받을 수 없는 용납을, 거기만 가면 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 가도 받을 수 없는 환영을, 거기에 가면 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 가도 받을 수 없는 칭찬을, 거기에 가면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용납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아도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넉넉한 위로를 받고 살며, 
가장 넉넉한 이해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남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 주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왜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삶의 전환점이 옵니다. 
자유와 해방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을 얻은 복입니다. 

III.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라(고전13:11)

이처럼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 받은 아버지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잘못된 아버지 이미지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에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의 헬라어 원문 “카타르게오”란 
“묶인 것을 풀어버린다”  “잘못 덧칠된 것을 씻는다”라는 뜻입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어린아이의 일, 어린시절 상처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치료해야 합니다.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치유를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치유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가지들이 푸르둥둥하게 생겼다고 자꾸 “오이”라고 놀립니다. 자기는 가진데 오이라고 자꾸 놀리니까, “내가 오이면 안 살고 죽는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나 가지지, 나 가지 맞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오이, 내 새끼”  그래서 죽었답니다.  

감기가 살았대요. 그런데 감기 중에 아주 못된 감기라서 다른 질병들이 놀립니다. “너는 감기가 아니고 암이라고...” 자꾸 놀리니까, 
“내가 감기가 아니고 암이면 죽고 만다.” 
그래서 집에 가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나 감기 맞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암~”  그래서 또 죽었답니다.  

청소년들이 주고받는 농담에 불과합니다만, 이 정체의식에 방황을 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농담이지요.
부모의 영향력을 깨끗이 극복하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뛰어 넘어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Identity,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정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자아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혼 후에도 마마보이, 파파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1)  

 카타르게오 - 버렸노라. 씻어버렸노라. 풀어버렸노라!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살아갑니다. 
어린시절 상처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상처에 묶여 또 다른 사람 
- 특별히 내 자녀들에게 상처를 전수하며 삽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한 은사를 받아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통역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화할 때 자녀들에겐 상처를 주고 남의 흉이나 보고 비난하고 부정적인 말을 일삼았습니다. 
․ 지식의 은사가 넘쳤고 귀신을 쫓고 영분별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인가엔 철부지였습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인정받지 못해 안달했습니다. 

․ 신령한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는데는 무력했습니다. 
․ 밖에 나가서는 존경받는 사람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도무지 존경이 가지 않습니다. 
․ 목사 앞에서는 충성스런 집사요 권사요 믿음 있어 보이는 장로입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사는 것 보면 아직도 입엔 독설이, 
 가슴엔 상처가 행동엔 악덕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악덕이 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깎아 내리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못된 성품을 말합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나는 어린아이의 상처를 버렸노라”
  “나는 어린아이의 기억을 버렸노라”

새댁이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를 지독하게 미워하다보면, 뱃속의 아이가 영락없이 시어머니를 닮아 태어납니다. 작은 눈에다가 하품하고 재채기하는 것까지 닮는다고 합니다. 쓴 뿌리는 태아에게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자라난 가정은 우리의 인격 형성, 우리의 정서 발달과 태도 그리고 행동 양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셀(Sell)은 “우리 몸은 우리 부모 곁을 떠나지만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사티어(Satir)라는 사람은 “가정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다. 
건강한 가정에서 자존감 높은 건강한 자녀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본 대로 살아간다는 거지요. 
그가 어릴 때 자라면서 어떤 말을 들었느냐 하는 것이 
그 인생의 미래를 열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때마다 내 가슴은 뛰구나”하는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중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하는 시 귀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스타일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삶의 영향력은 어른이 되더라도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향력을 가리켜서 심리학자들은 “성인 아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휴 미실다인(Hugh Missildine)이라는 사람이 「몸에 밴 어린 시절」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함으로 이제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창조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가장 소중한 열쇠가 있다면 
불행한 과거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속에 잠재하고 있는 성인 아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받아 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년시절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자녀들은 성인이 된 다음에 
자기 자녀를 학대할 확율이 3배가 더 높다고 합니다. 
알콜중독, 약물중독, 섹스중독 등 중독증에 걸려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중독증에 시달릴 확률이 2배나 더 높다고 합니다. 

IV. 성인 아이

1. 이기적, 자기중심적 얼굴!

일찍 아버지를 여윈 저는,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의 막내 아드님이셨고, 그 막내아들이 6.25의 상처로 일찍 당신 곁을 떠나자 불쌍하게 이 세상에 남게 된 내가 가여워서였든지 예뻐서였든지 할머니의 많은 손자 손녀들 가운데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명절날 생선의 가운데 토막을 뚝 짤라 당신의 몫이라고 챙겨두었다가 나를 몰래 할머니 방으로 불러 먹여 주시곤 했습니다. 

더구나 내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전부였습니다. 
단 한 번도 내 요구를 거절하신 적이 없고, 나를 나무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나는 철없는 아이가 되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남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만이 내 마음은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이 나의 못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인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나를 많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늘 나는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고, 교회에서도 교역자들과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초등학교 한 담임 선생님만은 나를 평범하게 대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나는 그 분을 나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어른이 된 나중까지 용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생활에서도 나의 이 성인 아이는 때로 나를 괴롭혀 왔습니다. 
한 번은 생선찌개를 끓였는데 아내는 아이들에게 먼저 퍼 주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이제는 어디가나 중년으로서의 대우를 받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많은 교우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2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해야 했으며,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기까지는 퍽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눈물의 기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즘 자라는 자녀들 가운데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인 아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독자는 독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정신병자다”하는 심리학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귀하다 보니 이기적인 성인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얘기지요. 특별히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2. “성취 지향적” 얼굴!

“성취 지향적”인 성인 아이의 얼굴이 있습니다. 

1등 컴플렉스에 걸린 아이가 있습니다. 시험 때만 되면 배가 아프고 2등을 하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아이의 배후에는 반드시 완전주의적 사고를 가진 부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95점 98점을 받고도 칭찬을 듣지 못합니다. 
“인석아, 조금 더 노력했으면 100점 받을 수 있잖아.” 
평생토록 성취 지향적인 삶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상당한 성취를 이룰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늘 불만을 갖게 됩니다. 
항상 열등감이 있고 자기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심리학에서는 “성공적인 실패자”라고 부릅니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출세를 할 것 같은데 영혼 안엔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인격개발이 안되었습니다. 푸근한 마음이 모자랍니다. 아직도 세상을 원망하며 삽니다. 
모든 「성인 아이」의 한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3. “반항아”의 얼굴!

반항 아이의 기질, 반항아의 성인 아이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구의 아버지는 군인이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도 군부대와 똑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매사에 지시하고 감독하고 훈계합니다. 
지나친 훈계와 체벌 때문에 이 아이의 얼굴은 분노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매사에 반항적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할 짓이요 부모의 모습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세상에 쏟을 상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4. 그 외 

유약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절제하지 못하는 성인아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두 부모가 다같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방치형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고독하고 외로운 성인 아이” 때문에 늘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거부형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학적인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이웃에게 늘 불만과 원망이 남아 있습니다. 

V. 아버지 상처 치유

1. 과거를 치유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내 몸에 밴 잘못된 성품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인아이를 치료하고 진정한 아버지로, 성숙한 성품으로, 아버지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먼저 과거를 치유해야 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과거를 괴로워한다고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용서하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조금씩 배워가야 할 필요가 있고, 우리가 온전히 배우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다 보면 옛날의 상처를 자꾸 생각하다 그 상처가 쓴 뿌리가 되어서, 낮이나 밤이나 먹을 때나 일할 때나 놀 때나 꿈속에서까지 나를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친구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못하면서도 원수를 묵상하고 상처를 기억하고 더듬는 시간에는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상처를 깨끗이 처리해 버렸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깨끗이 처리해 버리고 
아버지 마음을 회복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인 아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 속에 숨어 있는 성인 아이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끄집어 내야 합니다. 
내 부모가 내게 남겨준 잘못된 부정적인 영향이 도대체 무엇인가? 
내 부모는 사랑을 잘 표현하는 부모였는가? 아니면 유전적인 질병은 없었는가?
무속적인 관습은 없었는가? 학대적인 습관은 없었는가? 도벽이나 거짓말은 없었는가? 중독의 성향은 없었는가? 내 부모는 지나친 애정을 가지고 나를 길렀는가? 아니면 거부형 부모였는가? 완고한 부모였는가? 완벽주의 적인 부모였는가? 
여하에 따라서 내 성인 아이의 얼굴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문에는 거짓말하는 저주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20장에서 또 똑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아들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거짓말 내용까지 닮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삭의 아들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그 자식들은 자기 동생 요셉을 팔아 치우고는 죽었다고 거짓말 합니다.  

또한 그 집안에는 편애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스마엘보다는 이삭을 편애했고, 
이삭은 에서를 더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부인 가운데 라헬을 더 좋아했고, 
그 수많은 자녀들 가운데 요셉만을 편애하는 편애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조상들은 신학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 자전!”  

어떤 집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들이 아주 고급스럽고 멋진 30cm 자를 가지고 놀고 있더랍니다. “얘야 그거 못 보던 잔데 어디서 났니?” “학교에서, 친구건데 그냥 가져와 버렸어요.”
“이 녀석아, 그럼 도둑놈이잖아. 도적질하면 되니? 안되지. 아빠한테 얘길 해야지.” “아빠가 사주실려고요? 아빠는 이런 것 안 사주잖아요.” “이놈아, 아빠한테 얘기하면 회사에서 가져 올 수 있잖아.”
조상의 죄를 부모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범한 죄는 아니지만, 
나에게까지 파급이 미쳐왔던 그 죄를 자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40절 이하에 보면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속적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었던 내가 대신해서 내 부모의 죄를 우리조상들이 우리 가문에 쏟아놓았던 저주를 주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부모를, 조상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내 부모가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무지해서 내게 쌓아왔던 예수 밖에 있었던 저주의 흔적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억의 치유를 위한 진지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내게 상처가 있다는 것을 덮어 둘 필요가 없이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기도하고 용서를 선언했는데도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감정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의지적으로는 용서했지만 감정적으로 나를 괴롭힙니다. 잊어 버릴만 하면 쓴 뿌리가 한 번씩 나를 괴롭히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이머신을 타고 누군가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그 순간, 외로워서 고독해서 울었던 그 순간, 모질게 들었던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괴로움을 당했던 그 순간으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있는 그대로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다 들추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때 이렇게 아팠어요. 그래서 나는 울어야만 했어요. 
하나님 힘들었어요. 세상사람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어요. 
접어두고 감추어 두었지만은 10년, 20년, 30년...50년이 지났는데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주님만이 용서할 수 있고, 주님만이 치료할 수 있고, 주님만이 고쳐 주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만을 위해서 진지하게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아버지마음을 빼앗아간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내 부모가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무지해서 내게 쌓아왔던 예수 밖의 저주의 흔적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2.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십시오. 

오늘의 내가 이렇게 상처를 안고 못난 성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영향인 것만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내가 잘못 처리하고, 
잘못 수용하고, 잘못 반응했던 내 책임과 죄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요.
예레미야 31:29-30에 보면 퍽 재미있는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말라” 
즉, 내 이가 시린 것은 아버지가 먹었던 신 포도를 나도 먹었기 때문에 신 것이지, 나는 안 먹고 아버지만 먹었는데 자동적으로 내 이도 시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이대로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나의 잘못과 책임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 여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내가 받은 상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성숙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실패나 상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연약한 존재이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오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상처난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막2:17)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내 인생의 승리의 디딤돌로 삼고 살아가라는 얘기지요.

4.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예수님을 닮고,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성인아이를 치유하고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거기에 집중의 힘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미워하는 사람을 묵상하게 되면 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자꾸 빼앗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자꾸 흡수하게 되는 것이지요. 계속 그 사람을 생각하고 묵상하게 되다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그 사람의 영상에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 사람만 생각나고 주야로 그 사람만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이제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주변에 가까운 사람, 배우자와 여러분의 부모와 자녀를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상과 여러분의 목회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원수를 생각하던 시간에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제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성인 아이뿐만 아니고 모든 저주가 물러갔음을 
선포하십시오. 주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할렐루야!

과거에 묶여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주님께서 여러분의 죄의 짐을 다 짊어지셨고, 
여러분의 상처를, 모든 저주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미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어 놓고 살아가면 하늘에서도 묶여진 상태로 있으리라. 그러나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이 모든 저주의 짐들이 풀어지게 될 것이라.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