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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사람을 통해 믿음을 생각한다

  • 양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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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네 사람을 통해 믿음을 생각한다

막2:1-12

 2015.2.8


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큐티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설교하려고 작정한 때는 금년 1월 5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하지 못한 것은 순위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에도 본문으로 설교할 것인지 출애굽기 3장 14-22절을 가지고 설교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듯이 본문은 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누군가의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너무 많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상에 뉘인 채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인 채로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생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키가 1절에 있습니다.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마가복음 기자는 한 중풍병자가 고침 받은 때를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것은 전에도 그곳으로 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중요한 국제도로인 해변 길이 지나갈 정도로 매우 번창한 국경도시이기 때문에 세관을 두고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사셨고, 제 2의 고향처럼 여기시면서 그곳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하신 일이 주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장 21-34절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또 모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따라서 당시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거나 듣고서 중풍병자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거나 들으면 믿음이 생겨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거나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고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자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직접 보거나, 직접 본 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더 많이 보고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만 그리고 그 당대에만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에서 행한 기적은 가나에서만 볼 수 있었고,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은 가버나움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만큼 정직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은 만큼만 자랍니다. 말씀을 자주 읽고 들어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장사일지라도 하루만 밥을 거르면 힘을 쓰지 못하듯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믿음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제가 큐티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24시간이 지나면 70%를 잊어버리는데 어떻게 주일설교만으로 믿음이 생겨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목사의 설교 의존도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욱 악해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점점 악해지는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믿음으로 사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해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립니다. 필리핀 권영구 목사님이 ‘D3왕의사역’ 앱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스마트폰에 깔면 주일설교를 다시 반복해서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단, 애플은 운영체계가 달라 아직 설치할 수 없습니다. 성경과 설교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믿음이 생김으로 이 세상에서 이기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믿음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약해서 기도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까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우습게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가까이 하여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영원한 실패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승리와 영적인 승리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적인 승리는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명성을 얻는 것이지만 영적인 승리는 말씀대로 살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승리를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갔습니다. 특별히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13년을 쫓아다녔기 때문에 오랜 세월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세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얻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105편 15절 때문입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당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기름을 부어서 세웠습니다. 즉 사울 왕이 자신의 원수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극동방송 맹주완 대외협력국장의 전화를 받고 오후에 방송국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대화를 하던 중 매우 감동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북한 동포가 탈북을 준비했다가 그 땅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탈북을 포기하고 그곳에 남아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성공자입니까? 기복신앙으로 똘똘 뭉쳐서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비천한 삶을 살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순교한 자입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의 실패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중풍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께 나갔을 때에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습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문 앞까지도 들어설 수 없었습니다. 즉 장애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과정에는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애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그 장애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장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었으나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에 올라가자, 예수님의 눈에 뜨였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인 바디메오는 예수께서 가까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자, 주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께서 자신의 동네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갔지만 사람이 많아서 직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손을 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는 과정에 장애가 나타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장애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 도와주시지를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그런데 네 사람이 장애물을 만났을 때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께로 데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환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 앞에 달아내려놓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그 믿음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가면 반드시 고침받게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장애를 만나도 처음 가졌던 믿음을 잃지 않으면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가졌던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믿음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를 만나면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뛰어넘기 힘든 장애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불신과 절망이 최고의 장애입니다. ​한 기자가 전도자 무디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가장 큰 장애가 됩니까?” 그러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디라는 작자 때문에 가장 골치를 썩고 있소.”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 장애가 진짜 장애가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내 안에서 죽어있는 것이 큰 장애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정말 믿는 믿음이 살아있다면 그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살리는 일에 네 사람이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끝까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있었을까요? 처음에 그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과정에서 하나 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로 데려갔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각자의 생각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번에는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이용하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일에 주동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장애가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환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자.” 그러자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의 말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여러 사람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진하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소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 함께 주의 일을 일하다가 중도에 다투고 갈라서는 것은 ‘전진하는 믿음’만 가지기 있고 ‘겸손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불어닥치는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전진하는 믿음’과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전진하는 믿음이 있어도 겸손한 믿음이 없으면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앞에 달아내리자 예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5절 전반절만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타인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낸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형법 제 366조의 손괴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법 366조는 손괴죄를 범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로 나가는 일이라면 모든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정직성과 도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남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낸 행위를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주님께 나아온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후 비용을 들여서 다시 원상복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 있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다는 자세로 헌신할 때에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저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더처치를 여러분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믿음을 가상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새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성경은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 사람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는 줄 알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어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본인의 믿음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10-11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사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죄 사함과 구원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은 본인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노력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네 사람이 가졌던 믿음을 갖고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장애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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