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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주간에 좋은 고난을 선택하다

  • 양창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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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고난 주간에 좋은 고난을 선택하다

벧전2:19-21

2015.3.29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의 첫째 날인 주일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주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요 12:13; 마 21:8)라는 의미인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서 펴며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고난주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주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오늘 전체적으로 한번 살펴보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고난 주간에 좋은 고난을 선택하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난주간 첫째 날인 주일 아침에는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그날 저녁에 다시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셨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일찍 성으로 들어오시다가 열매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셨고 성전으로 들어오셔서 마치 강도의 굴혈 같이 되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난주일 둘째 날인 월요일을 ‘성전정화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날, 즉 고난주간 셋째 날인 화요일에는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을 미워하여 당시 교권자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세 가지 질문을 던지자 이에 답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아니한가?’,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와 살았던 아내의 경우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가?’ 그래서 화요일을 ‘변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변론을 마치시고 성전 밖으로 나가실 때에 예루살렘 성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올라가셔서 마주 보이는 성전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징조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감람산 강화’라고 합니다.


고난주간 넷째 날인 수요일에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지 않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는데,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을 칭찬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책망하고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난주간 넷째 날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죽음을 하루 앞둔 날입니다. 예수께서 무교절 첫날에 최후의 만찬을 준비토록 하셨습니다. 원래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이 시작되는 날, 해지기 전에 양을 잡아 쓴 나물과 함께 준비해 두었다가 해가 지는 시점인 오후 6시를 전후로 하여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기에, 하루 앞당겨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성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히셔서(마26 :47-56, 막14 :32-52),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막 14: 53-72, 요 18: 13-27). 그러는 동안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마 26: 69-75)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마 27: 2-11, 31, 요 18: 13- 29),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 주간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당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가 고난 주간에 어떤 고난을 당해야 할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지혜롭지 못한 언행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모든 고난은 죄로부터 온다고 주장하지만 죄를 짓지 않아도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런 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자신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자신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자기의 부모와 형제까지 다 자기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 꿈을 꾸고 형제들에게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하면 형제들이 그를 더욱 더 미워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형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은 30냥에 애굽으로 팔려가는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 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형제들과 관련하여 꿈을 꾼 것을 말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 예를 든다면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나발입니다. 나발은 양 3천 마리와 염소 1천 마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당대에 그 지역에서는 가장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광야에 피신하고 있을 때 나발이 갈멜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10명의 소년을 보내며 먹을 것을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단숨에 다윗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다윗이 6백 명의 일행 중에 2백 명은 소유물 곁에 남겨두고 4백 명을 무장시켜 나발을 치러 나서자 그 말을 전해들은 나발이 충격을 받아 10일 후에 죽게 되었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평소 자신의 양들을 보호해 준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신입니다. 그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 10일간 고난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인생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음을 알고 다윗처럼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세상의 법을 어김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대한민국의 통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국가가 정한 법을 준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면 민형사상의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처벌을 받으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법을 어겨서 처벌을 당함으로 고난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이 세상의 범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 혹자는 헌금을 많이 내기 위해서라면 불법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입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직하게 번 돈을 드려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많이 드리기 위해 불법을 계획하면 안 됩니다. 결국 불법은 드러나서 법의 심판을 받아 고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말씀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고난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왜 고난이 닥쳐왔습니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순종은 고난을 낳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에 뱃속에서 3일간 고난당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왜 그런 고난을 당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이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어느 자매가 있었습니다. 혼기가 차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합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도 좋고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인물도 좋아야 하는데 그런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없지만 돈도 많고 인물도 좋고 학벌도 좋은 비신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행복할 것 같은 결혼생활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며 숱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7년 만에 이혼해서 가정이 파탄 나고 말았습니다. 왜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아 고통을 당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성경은 신자와 비신자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조건을 보고 결혼하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 뒤에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하면 잠시는 편해도 나중에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넷째로, 마귀가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영적으로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 1:12). 마귀는 자기 자식을 빼앗겼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군가에게 자식을 빼앗기고 가만히 있을 자가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가장 크게 당한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욥’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토록 큰 고난을 당했습니까? 마귀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하나님 앞에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자랑하고 싶으셔서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하나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시고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정면으로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그 많던 욥의 재물이 다 날라 가고 10자녀를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하나님께서 또 마귀에게 욥을 자랑하자 마귀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러자 마귀가 욥에게 악창이 나게 하므로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기왓장으로 긁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각종 고난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마귀의 공격으로 행복한 가정에 위기가 불어 닥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 마귀의 공격으로 고난을 당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만큼만 마귀의 시험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주신다고 약속하셨고(고전 10:13),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9절을 보십시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고난당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당하는 고난을 부당하게 당하는 고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을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선한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단순히 착한 일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 38절을 통하여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께서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복음을 가르치고 증거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선한 일은 없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일까요? 복음을 전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선한 일은 육신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달려가는 자를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주위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7년 간이나 가족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절을 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부당히 고난당할 때에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십자가 밑에 머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고난이 지나가기 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에 참지 않으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혹 복음을 전하는 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견뎌야 합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신앙에 실패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에 견디면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 20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칭찬을 받지 못하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거나 마귀의 공격으로 고난당해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나 불순종으로 고난을 당하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전해도 고난을 당해야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이 바로 이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 스테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최초로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스테반이 순교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보좌에 앉아 계시던 주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왜 주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일어나셨을까요? 앉아서 보시고만 없을 정도로 그가 당하는 고난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 고난을 당할 때에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주시고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빛나는 면류관을 씌여주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고난을 당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을 어김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공격을 받아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는 고난은 바람직한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선택하지 못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다른 일로 고난을 당하더라도 고난 주간만큼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고 그 일로 고난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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