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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호한 시대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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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시대의 공존  

- 김흥규 목사 (내리교회)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다. 농부가 좋은 씨앗을 자기 밭에다 뿌렸다. 한밤중에 그의 원수가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렸다. 싹과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 드문드문 가라지도 보였다. 언제 어떻게 가라지가 생겼는지 몰랐지만 때가 되니 정체가 드러났다. 애당초부터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종들이 가라지를 모조리 뽑아내겠다고 건의하자 주인이 대답한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 29∼30)."

주인은 밀과 가라지의 공존을 허용한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밀까지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에 애착이 가서가 아니라 밀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에서 불안한 동거를 허락한다. 그러나 밀과 가라지는 추수 때까지 한시적으로 공생할 뿐이다. 추수기에 추수꾼은 가라지는 불태워버리고, 알곡은 주인의 곳간에 거둬들일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추수철이 이르기도 전에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했던 과격파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열심당원들이요,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이었다. 전자는 하루빨리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져내야 한다는 이유로 로마 정부와 군대, 이에 빌붙어 사는 유대 어용 지도자들을 무조건 제거해야 할 가라지로 지목했다. 후자 역시 세리와 창기를 죄인으로 규정하며 이들과의 교제를 엄금했다.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들의 성급한 심판에 제동을 걸면서 인내와 관용을 가르치신다. 누가 알곡이고 쭉정이인지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최후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문이다.

쇠고기 파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 좌파와 우파,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강경파와 온건파의 분열이 첨예하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을 뽑아내야 할 가라지라고 속단한다. 그러나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뒤섞여 자라듯이, 이 세상이나 교회 역시 선과 악,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가 혼재돼 있다.

'모호성(ambiguity)', 세상이나 교회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던가. 누가 진짜 알곡이고 쭉정이인지는 주님 한 분만이 온전히 아실 뿐이다. 쭉정이를 손본다고 설치다가 알곡까지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록 알곡이라고 자부할지라도 쭉정이와 더불어 사는 공존의 지혜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에 필요한 미덕은 이웃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는 겸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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