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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중국의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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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상하이에 1920∼30년대 유대인들이 세운 건물들이 적잖게 남아있다.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와이탄의 피스호텔을 비롯해 메트로폴호텔, 그로스브너 하우스 등이다.

유대인의 상하이 이주는 몇 차례 진행됐다. 첫번째는 1842년 상하이 개항 이후 '사순 일가' 주도로 바그다드, 인도 등을 거쳐 들어온 유대인 700명이다. 이후 1895년부터 10년간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이주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상하이 거주 러시아 출신 유대인은 4000명을 넘어서고 유대사원만 7곳에 달하게 된다. 그 유대사원 중 현재는 오헬 라헬과 오헬 모셰 등 2곳만 남아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비자나 여권이 필요치 않았던 상하이로 몰려든 유대인들도 있다. 그리고 이주 유대인 2만여명은 '사순' '카두리' 등 두 패밀리의 주도 하에 상하이의 무역 은행 부동산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중국 공산정권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상하이에 거주했던 유대인 대부분이 이스라엘 또는 미국 호주 등으로 떠났다. 그런 유대인들이 1992년 중국과 이스라엘 수교를 계기로 상하이를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부와 부친이 하얼빈에서 살았던 에후드 올메르트가 2006년 3월 이스라엘 총리가 되면서 중국과 이스라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현재 상하이 거주 유대인은 1500명을 넘어섰으며 앞으로 5000명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중국 유대인의 역사는 매우 길다. 유대 구전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221년 한(漢)나라 시대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최근 중국에서 당나라 시대 유대인 무역상이 히브리어로 쓴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사료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1127년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씌어있다. 허난성 카이펑에서 살던 유대인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하얼빈에는 1920년 당시 유대인들이 2만여명이 살았다. 지금도 유대인 공동묘지와 사원, 유대인 학교 등이 남아있다. 올메르트 총리의 조부모 무덤도 하얼빈 유대인 공동묘지에 있다. 올메르트 총리는 "나의 절반은 중국 하얼빈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친중국적이다. 역사와 유적, 유물은 후세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확신 이상을 주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상하이에는 기독교와 동방정교회,가톨릭 등의 유적도 적잖다. 특히 인민광장 근처에 있는 삼자교회 무언탕(沐恩堂) 종루에는 높이 5m에 달하는 네온사인 십자가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님의 은혜에 빠지다' '주님의 은혜를 입다'라는 뜻의 무언탕 교회는 원래 1887년 '무어'라는 미국인이 사재를 털어 헌납한 교회다. 건축 당시에는 '무어 메모리얼교회'라고 불려졌던 기독교감리회 예배당이었다. 192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뒤 새 건물이 지어졌고, 1958년부터는 무언탕이라고 불리게 됐다. 벽돌과 나무를 이용해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무언탕은 전체 수용인원이 1000명에 달한다.

함태경 상하이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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